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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종래에 학자들이 시데하라 아키라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쟁으로 말미암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사약을 받아 죽었다고 주장해 왔으나 사실무근이다. 당쟁이 격심했던 이 시기는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부터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까지 50년 정도였으며, 이때 정치적 이유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이건창]]이 지은 《당의통략》에 따르면, 모두 79명으로 1년에 약 1.6명이다. 이는 서양에서 당파 사이의 대립이 격심했던 때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가 희생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10일]] 하루에만 무려 1천3백 명이 정치적 이유로 희생되었으며, [[파리 코뮌]] 기간, 흔히 “피의 주간”이라 불렸던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7일 동안 2만5천 명이 희생되었다.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1905년]] [[1월 22일]] 당일에는 15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게다가 당쟁이 격심했던 그 시기에 가장 민생이 안정되었음을 볼 때 역설적이게도 당쟁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이 살기 좋았다. 이는 오늘날 역사에 '견제와 균형만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교훈을 일깨워준다. 이와 반대로 분열과 대립이 없는 정치는 독재정치거나 요순임금과 같은 지극히 이상적인 정치밖에 될 수없다는 것이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인간은 반드시 역사의 저주를 받아서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 붕당 정치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썩은 악취를 풍기다가 최악의 형태로 고착된 것이 바로 [[세도정치]]이고. 19세기 전반 역사를 허비하게 한 이 세도정치 때문에 한민족의 역사는 180도 바뀐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기였다. 흥선대원군 집권 후 불과 5년만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만다. 일제 강점, 분단 등의 모든 피해는 바로 세도정치 때문이고 그 세도정치의 전신이 바로 붕당임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의견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붕당을 무조건 부정적으로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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