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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녀를 꽃을 나이가 되자 그녀는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을 가서 [[사마염]](司馬炎), [[사마유]](司馬攸), 사마조(司馬兆), 사마정국(司馬定國), 사마광덕(司馬廣德), 경조장공주(京兆長公主)를 낳았다. 그녀는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 아내의 도리를 다했고, 겸손하고 온화하게 아랫사람을 대하여 비빈들에게 질서가 있었다.
 
어느날 [[사마소]](司馬昭)의 곁으로 [[종회]](鍾會)가 재능으로 중용되자 그녀는 “[[종회]](鍾會)는 이득을 보면 정의를 잊고 사단을 일으키길 좋아하여 총애가 과하면 반드시 난리을 일으킬 사람이니 중용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언제나 [[사마소]](司馬昭)에게 고하였고, 그 후 마침내 [[종회]](鍾會)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뒤 264년 [[사마소]](司馬昭)가 진 왕이왕에 되자오르자 그녀는 진 왕비가 되었다.
 
265년에 남편 [[사마소]](司馬昭)가 사망하고, 그녀의 장남인 [[사마염]]이 뒤를 이은 후 [[위]]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나라를 새워 황제에 즉위해 세조 무제(世祖 武帝)가 되자, [[황태후]](皇太后)가 되어 숭화궁(崇化宮)에 거처하게 된다. 처음에 궁경을 두며, 직책을 신중히 가렸으며, 비록 고귀한 자리에 있었으나 옛날의 일을 잊지 않고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268년에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숭양릉(崇陽陵)에 [[사마소]]와 같이 합장 되었다.<ref name="z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