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1세 (잉글랜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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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즉위 이전 ===
메리 1세는 오랜 기간동안 아버지 [[잉글랜드의 헨리 8세|헨리 8세]]의 외동딸이었다. 메리 1세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가 틀어질 때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헨리 8세는 메리 1세에게 영국 왕족 중 처음으로 웨일스의 여공작(Princess of Wales) 칭호를 내렸고 처음으로 독립된 궁정을 두도록 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왕가의 존속을 위하여 간절히 아들이 탄생하기를 바랐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여, 새 [[황후|왕비]]가 된 앤에 의해서 공주로서의 자격이 정지되었다. 이복 여동생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엘리자베스]]가 태어나자 [[앤 불린]]은 메리의 왕위 계승권을 빼앗아, 서녀 취급하도록 했다.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에 의해 간신히 공주로서의 신분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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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1554년]] 7월 20일에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 이때 메리의 나이는 38살, 펠리페의 나이는 27살이었다. 1556년에 펠리페는 본국으로 귀국하여 펠리페 2세로서 국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1년 반 후에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겨우 3개월만 머무르고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간 전쟁에 휘말려 프랑스에 패하여 대륙에 가지고 있던 마지막 영토인 [[칼레]]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다.
 
펠리페 2세와 결혼한 후, 메리는 아이를 간곡히 바랐지만 난소종양에 걸려 아이를 낳지 못했다. 한편, 메리는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을 궁정에서 쫓아버린 [[앤 불린]]의 딸인 이복여동생 엘리자베스를 평생 동안 미워했다. 여동생의 [[세례성사]]에 서자로서 보좌할 것을 명령받은 굴욕을 맛보고 나서 시작된 원한은 뿌리가 깊었던 것이었다. [[앤 불린]]이 처형될 때까지 엘리자베스의 하녀로 봉사했던 것도 사실이다. 메리는 죽기 전날에, 자신의 후계자로서 여동생을 지명했다. 메리 1세는 5년 남짓한 재위한 후, 난소암에 걸려 [[1558년]] 11월 17일에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사망하였다. 메리의 기일은 200년 동안, 압정에서 해방된 축제일로서 기념되었다.
메리 1세는 5년 남짓한 재위한 후, 난소암에 걸려 [[1558년]] 11월 17일에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사망하였다. 메리의 기일은 200년 동안, 압정에서 해방된 축제일로서 기념되었다.
 
== 바깥 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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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 앞이름 = 전 대
| 뒤이름 = 후 대
| 전임자 = [[제인 그레이]]
| 임기 = [[1553년]] [[7월 19일]] ~ [[1558년]] [[11월 17일]]
| 직책 = [[영국의 군주|잉글랜드의 여왕]]
| 후임자 = [[엘리자베스 1세]]
}}
{{전임후임
| 앞이름 = 전 대
| 뒤이름 = 후 대
| 전임자 =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 임기 = [[1554년]] [[6월 25일]] ~ [[1558년]] [[11월 17일]]
| 직책 = [[나폴리의 군주 배우자|나폴리의 왕비]]
| 후임자 = [[이사벨 데 발로이스]]
}}
{{전임후임
| 앞이름 = 전 대
| 뒤이름 = 후 대
| 전임자 =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 임기 = [[1556년]] [[6월 16일]] ~ [[1558년]] [[11월 17일]]
| 직책 = [[스페인의 군주 배우자|에스파냐와]] [[시칠리아의 군주 배우자|시칠리아의 왕비]]
| 후임자 = [[이사벨 데 발로이스]]
}}
{{오스트리아 대공비}}
 
[[분류:1516년 태어남|메리 1세]]
[[분류:1558년 죽음|메리 1세]]
[[분류:잉글랜드의 군주|메리 1세]]
[[분류:튜더 왕가|메리 1세]]
[[분류:스페인의 왕비]]
[[분류: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