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읍: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CND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CCND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9번째 줄:
|홈페이지 = [http://ganggyeong.nonsan.go.kr 강경읍사무소]
}}
'''강경읍'''(江景邑)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시]] 서부에 있는 [[읍]]이다. [[논산천]]이 논산평야를 가로질러 [[금강]]으로 유입되는 곳으로, 해상 교통과 내륙 교통을 잇는 큰 포구로 번성하였다. [[함경남도]] [[원산시]]에 있는 [[동해|동해안]]의 원산항과 더불어 '조선 2대 포구'로 불렸던 수산항이었고, 100여 척의 배가 드나들 정도로 큰 포구였다. 금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전국적으로 유통시키는 중심지였으며, 전국 각지의 상품을 유입하어 금강 주변 지역으로 분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강경장은 전국 3대 시장이었다. 강경포구와 강경젓갈이 유명하며유명하다. 법원, 검찰청, 경찰서 등 논산시 주요 공공기관이 있다위치한다.
 
== 지리 ==
강경읍은 [[논산시]]의 서부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 동쪽는 [[연무읍]]과 [[채운면]], 서쪽은 [[금강]]과 [[부여군]] [[세도면]], 남쪽은 [[전라북도]] [[익산군]] 망성면, 북쪽은 성동면과 접하고 있다. 강경읍 주위에는 평야지대가 있어 곡창지대로서 알려지고 있다. 금강을 통해 [[황해]]로 나아갈 수 있어 강경포구는 유명한 수산항이었다. 강경포는 강폭이 400m에 달해 대형선박의 출입이 가능했다.
 
[[계룡산]]과 [[대둔산 (전북충남)|대둔산]]에서 발원한 금강의 지류들이 북서쪽으로 돌아 남쪽으로 흘러내려오다가 [[논산천]]에서 합류하고 논산천은 강경읍 부근에서 금강본류와 합류한다. 금강과 지류들은 [[논산평야]]의 젖줄 노릇을 하고 있고, 금강은 천혜적인 방위선인 동시에 교통수단이 되어왔다되어 왔다.
 
== 역사 ==
35번째 줄:
이로 인해 [[1900년대]] 들어 조선에서 근대화의 수혜를 입는 첫 번째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강경포로 대거 진출하여 시장에 각종 상점과 금융 건물을 세웠다. [[1910년대]] 초반에 지어진 [[한일은행]] 건물이 대표적이다. 강경은 전성기에 인구가 3만명에 달했고 유동인구는 10만명에 달했다. 1920년대 [[충청남도]]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강경이었고, 근처에 세워진 소규모 수력발전소에서 전기를 공급하였다. 강경극장도 세워졌다.
 
강경포가 위치해 있는 지역의 행정 구역은 여러 차례 변동을 거쳤다. 일본인들이 진출해 시가지를 조성한 후인 [[1912년]]에는 [[충청남도]] [[은진군]] 김포면이었고, 2년 후 은진군이 논산군으로 개편되면서 [[1914년]]에는 강경면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충청남도 강경읍과 경계에 있었던 전라북도 [[여산군]]과 [[익산군]] 북부 일부 리가 단계적으로 강경읍으로 편입되었다편입되어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다.
 
강경에는 김대건 신부가 처음으로 전도를 시작한 사바위 성당,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 침례교회,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강경 성결교회가 소재하고 있다.
44번째 줄:
* 1915년: 익산군 망성면 작촌리 일부를 강경면에 편입
* 1931년 4월 1일: 강경읍으로 승격
* 1931년~1933년 : [[금강]] 하류 개수공사 (논산천, 강경천 제방축조)
* 1936년 3월: [[채운면]] 제내리, 산양리, 삼거리, 신촌리 일부를 강경읍에 편입하여 행정구역 확장
* 1996년 3월 1일: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법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