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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의 성립에 대해서는 [[수서 (책)|수서]]의 '''예문지'''(藝文志), '''경전석문'''(經典釋文)의 서록(書錄), 정현(鄭玄)이 쓴 '''육예론'''(六藝論)의 일문(逸文) 등에서 각각 논하고 있지만, 서로 모순되어 정확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중에서도 유력한 학설은 두 존재한다.
그 첫번째는 [[수서 (책)|수서]]의 경적지(經籍志)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서한]](西漢) 시기의 궁정 도서인 한서(漢書) "예문지"에는 "[[기|기(記)]]" 141 편이 있다. 이 중에서 먼저 대덕(戴徳)이 85 편을 골라 "예기"를 만들었다. 다음 대덕의 큰 조카였던 대성(戴聖)이 대덕의 예기에서 또한 46 편을 골라 별도로 "예기"를 만들었다. 대덕과 대성을 구분하기 위해 대덕을 대대(大戴), 대성을 소대(小戴)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덕의 "예기"를 '''
두 번째 학설은 정현의 "육예론"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에서 대덕과 대성이 따로따로 골라, 각각 "
이외에도 "
한나라에있는 "대대례기"와 "소대례기"는 모두 학관에 세워질 수 있어, 후한에는 열네 박사의 하나가되었다. 이 두 사람 중 후한 말기의 대학자 정현은 "소대례기"에만 주석을 붙였다. 이후 정현의 명성도 있고 정현의 주석이 붙은 "소대례기"가 쓰였기 때문에 "대대례기"의 비중은 작아지고 "소대례기"만 유행하게 되었다. 결국 "소대례기"를 줄여 "예기"라고 불르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예기"의 원형이다. 또한 현존하는 "대대례기"는 81 편 중 39 편 밖에 남아 있지 않다. (편 수를 세는 방법은 다양하다.)
=== 『예기』의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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