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공방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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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주축이 된 추축군([[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은 소련을 침공했다([[바르바로사 작전]]). 폭격으로 소련공군을 지상에서 분쇄한 독일군은 [[전격전]] 전술에 따라 따라 깊게 소련 영내로 파고들었다. 이 작전은 기갑부대가 양갈래로 전선을 돌파하고 후속부대의 포위를 통해 고립지대 내의 소련군을 섬멸하는 것이다. 독일군의 주 공세는 세 갈래로 나뉘어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했고, 북방집단군은 레닌그라드로, 남방집단군은 우크라이나로 각각 향했다. 소련군의 방위선은 독일군의 공세앞에 무력했고 병력 및 장비의 손실은 막대했다.
1941년 7월까지 중앙집단군은 소련군 수개의 야전군을 [[민스크]] 근방에서 포위섬멸하여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소련군의 방위선에 커다란 돌파구를 만들었다. 이것은 소련의 서부전선군의 붕괴를 뜻했으며 동원가능한 예비병력이 부족한 소련이 즉각 메우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이 패배로 스탈린의 진노를 산 서부전선군 총사령관 파블로프 상급대장은 모스크바로 송환되어 처형되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모스크바의 천연방어막인 [[드네프르 강]]을 매우 적은 병력 손실로 도하할 수 있었다.
1941년 8월, 독일군은 모스크바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인 [[스몰렌스크]]를 함락시켰다. 스몰렌스크는 역사적으로 모스크바로 통하는 "열쇠"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은 [[드비나 강]], [[드네프르 강]]을 포함한 몇 개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보유하고 있어서 가교건설 없이도 육상부대의 진격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었다. 절박한 소련군의 [[스몰렌스크 전투|스몰렌스크 방위]]는 7월10일부터 9월 10일까지 두달간 계속되었다.<ref name="GSOSmolensk">Great Soviet Encyclopedia, Moscow, 1973–1978, entry "Battle of Smolensk"</ref> 치열했던 스몰렌스크 전투때문에 독일군의 전격전은 9월중순까지 분쇄되어, 중앙집단군은 전략 예비사단의 반(24개 중 10개)을 투입할 정도였다.
다른 곳에서도 독일군의 진격은 둔화되었다. 레닌그라드 근방에서는 북방집단군의 공세는 [[루가 방위선]]에서 한달간 지체된 끝에 겨우 돌파될 수 있었다.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을 포함한 남부집단군은 훈련, 장비나 숙련도에서 다른 독일군 부대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에 소련군의 몇번의 반격을 받고 진격을 멈췄다. 독일 국방군은 이제 딜레마에 빠졌다. [[독일 중부집단군|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까지 진격할 만한 충분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만약 이렇게 전진한다면 러시아 중부에 커다란 돌출부를 만들어 소련군의 측면공격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더욱이, 히틀러에 따르면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식량과 광물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ref name="Guderian272">Guderian, p.272</ref> 그러므로, 우선 우크라이나 방면의 [[돈바스]] 지역을 점령하고 후에 모스크바로 진격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ref>Guderian, p.267–269</ref> 중부집단군의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군은 룬트슈테트가 지휘하던 남부집단군의 키예프 공략을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키예프 함락은 소련군에게 큰 타격이었다. 9월 19일, [[게오르기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는 각각 스탈린에게 키예프에서 철수할 것을 권유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런 스탈린과 의견충돌때문에 주코프는 총참모장 직에서 해임되었지만, 그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소련군 수개 야전군은 독일군의 양갈래 협공전법에 포위섬멸되고, 독일군은 남방으로의 진격로를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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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초기 작전계획은 두 개의 초기 기동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양갈래 돌파로 [[뱌지마]] 근방에서 소련군의 [[소련 서부 전선군|서부 전선군]]과 예비전선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단일돌파로 [[브랸스크 전선군]]을 포위하고 [[브랸스크]] 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또 하나의 북쪽과 남쪽으로부터의 신속한 양갈래 돌파로 모스크바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벌써 병참보급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를들어 구데리안은 후에 회고록에서 작전 초기부터 파괴된 전차가 보충되지 않고, 기계화부대의 연료가 부족했다고 썼다.<ref>Guderian, p. 307</ref>
독일군을 맞는 소련군은 3개 전선군이었는데, 이 부대들은 지난 몇 개월동안 격전에서 소진된 야전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스크바 방위군의 전력은 총 1,250,000명의 병력, 1,000대의 전차, 7,600 문의 야포 및 677대의 항공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부대들은 양적으로는 독일군에게 의미있는 위협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부대가 단일방위선을 구성하도록 부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는데다가, 후방에는 거의 예비병력이 없었다.<ref name="MosEnc" /> 바실레프스키는 회고록에서 소련의 즉각적인 방위전력은 잘 준비되고 있었지만, 이러한 배치의 오류때문에 독일군이 초반전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밝혔다.<ref>Vasilevsky, p.139</ref> 더욱이 소련군의 대부분은 전투경험이 부족했고, 대전차장비와 같은 결정적 무기가 부족했으며 소련군의 전차들은 구식이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시주위에 확장된 방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르제프-뱌지마 방위선]]이 [[르제프]] ~ [[뱌지마]] ~ [[브랸스크]] 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두 번째로 [[칼리닌]]과 [[칼루가]] 사이에 [[모자이스크]] 이중 방위선이 구축되었다. 마지막으로 모스크바 주위에 3중 방위환이 구축되어 모스크바 방위구역을 이루었다. 그러나 작전초기에는 아직도 독일군의 신속한 진격때문에 아직도 방어 준비는 대체로 불완전하였다.<ref name="MosEnc" /> 더욱이, 독일군의 공격계획이 늦게 파악되어 9월 27일이 되어야 소련군 부대에 완전 방위태세의 명령이 하달되었다.<ref name="MosEnc" /> 그러나, [[볼가 강]] 유역, 아시아, 우랄에서 새로운 소련군 사단들이 창설되고 있었고 이러한 사단들을 짧은시간안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모스크바 방위전은 시간을 다투는 경주로 만들었다.<ref>Vasilevsky, p. 138</ref>
=== 뱌지마-브랸스크 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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뱌지마 근방에서 소련 서부전선군과 예비전선군은 고도로 기동화된 [[독일 3 기갑군|독일 제3]], [[독일 4 기갑군|제4 기갑군]]에게 순식간에 참패했다. 이 기갑군은 방위선의 약한 부분을 공략하여 신속히 소련군의 방위선을 돌파하여 배후로 쇄도했다. 아직도 건설 중이었던 방위망은 독일군 2개 기갑군이 10월 10일 뱌지마에서 조우하자 유린되었다.<ref name="GlantzVAB" /> 4개의 소련 야전군 (19, 20, 24, 32 군)이 시의 서쪽에서 포위망에 갇혔다.<ref name="Vasilevsky139">Vasilevsky, p. 139</ref>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포위된 소련군은 쉽게 항복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전투는 치열하고 결사적이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략에 사용될 28개 사단을 소련군을 포위섬멸하는 데 사용해야만 했다. 포위되지 않은 소련군과 서부전선군과 예비전선군의 나머지는 후퇴하는 데 성공하여 모자이스크 방위선을 공고히할 수 있었다.<ref name="Vasilevsky139" /> 더욱이, 포위된 소련군의 일부는 소대단위부터 보병사단까지 부대단위로 탈출에 성공하여 완전히 섬멸되지 않았다.
브랸스크 남방에서는 소련의 초기 대응이 뱌지마 방면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독일 제2기갑군은 전진하는 제2군과 함께 모든 전선을 포위하는 기동을 하여 10월 3일 [[오룔]], 10월 6일 브랸스크 를 점령하였다. 소련군 제3, 제13군은 포위되었지만 또다시 항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집단으로 나뉘어 포위망을 탈출, 포니리와 므쩬스크 근방의 인접 방위선까지 후퇴하였다. [[10월 23일]]까지 마지막 남은 부대가 포위망에서 탈출하였다.<ref name="MosEnc" />
10월 7일까지 이 방면에 대한 독일의 공세는 주춤해졌다. 첫눈이 내린후 녹아서 도로를 러시아어로 "[[라스푸티챠]]"로 불리는 진흙뻘로 만들었다. 독일군 기갑부대의 진격이 현저히 늦주어졌고, 사람과 전차를 탈진시켜 이른 기동을 할 수 없었다.<ref>Guderian, p.316</ref> 므쩬스크 근방에서 [[독일 4 기갑사단|독일군 4기갑사단]]은 렐류센코와 카투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 새로 생산된 [[T-34]] 전차가 독일군 전차부대가 앞을 지날때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들은 보병의 엄호부대와 함께 독일군 [[4호 전차]] 대열의 양 측면을 물어뜯었다. 독일군에게 있어서 이 패배는 큰 충격이었기 때문에 수뇌부는 특별조사를 명령했다.<ref name="GlantzVAB" /> 절망적이게도 구데리안과 그의 부대는 새로운 T-34가 대부분의 독일 전차포에 끄떡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구데리안이 썼듯이, "우리 4호 전차의 짧은 75mm 전차포는 후부엔진을 명중시켰을때만 T-34를 격파할 수 있었다".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러시아인은 이미 몇가지를 배웠다."고 썼다.
[[파일:Schlamm1941.jpg|250px|right|thumb|1941년 진흙뻘로 변한 소련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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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글란츠(David Glantz)가 자신의 저서 "거인들의 대결 (When Titans Clashed)" 에서 밝혔듯이, 10월 하순의 독일군과 소련군은 펀치드렁큰 현상에 걸린 권투선수로 비유할 수 있다. 즉, 상대방을 때려눕힐 힘을 상실한 채 불안정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독일군은 소모전에 말려들어 전체 보유 차량의 1/3만 가동할 수 있었고, 보병사단은 전력을 1/3에서 1/2까지 상실한데다가 겨울에 필요한 의복이나 동계장비등을 보급할 수 없는 심각한 병참문제를 안고 있었다. 히틀러조차도 1939년 바르샤바 포위전에서 중무장 보병의 원호없는 기갑부대가 큰 손실을 본 것을 상기하여, 장기전으로 생각을 바꾼것처럼 보였다.<ref name="GlantzTTG">Glantz, chapter 6, sub-ch. "To the Gates", p.80 and following.</ref>
절망상태에 빠진 시민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해서 스탈린은 10월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에 붉은 광장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소련군 부대는 [[크레믈린]]을 지나 바로 전선으로 행진했다. 그러나 이런 대담한 행사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있었다. 독일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클린과 툴라 방면에 추가로 10만명의 병력이 증원되었지만, 소련군의 방위선은 아직 비교적 약했다. 예비병력이 없음을 지적하는 주코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독일군에 대해 몇가지 선제공격을 계획했다.
알렉시노 근방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병력과 장비면에서 소련군에 전체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독일군은 943,000명의 병력과, 1,500대의 전차, 그리고 65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소련군은 겨우 500,000명의 병력과, 890대의 전차, 1,000대의 항공기로 줄어든 모습이었다.
11월 15일까지 땅은 완전히 얼어붙어서 진흙탕 문제는 해결되었다. 독일군 기갑사단들의 고삐는 풀렸고 모스크바를 포위하여 모스크바 동쪽의 [[노긴스크]]에서 합류하는 것을 목표로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 목표를 위해 다시 양갈래 돌파전법을 사용, 독일 제3, 제4 기갑군은 모스크바 저수지와 모자이스크 사이에 병력을 집중시킨다음 클린과 솔네츠노고르스크로 향해 북쪽으로부터 시를 포위하려고 했다. 남쪽에서는 제2 기갑군이 소련군 수중의 툴라를 우회하여 [[카쉬라]]와 [[콜롬마]]로 진격하여 최종적으로 노긴스크에서 북쪽으로부터 진격해온 갈래와 합류할 예정이었다.<ref name="MosEnc" />
=== 최후의 양갈래돌파 ===
11월15일, 독일 기갑군은 클린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스탈린의 볼론콜람스크 방면의 반격명령을 위해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소련군의 예비병력이 없었다. 독일군의 초기공세는 이 전선군을 양분하여 소련군 16군과 30군을 분단시켰다.
독일 제3기갑군은 격전끝에 11월 24일 클린, 그리고 다음날 솔네츠네고르스크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의 저항은 아직 강했고, 전투의 향방은 아직 알수 없었다. 후에 알려진대로,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모스크바가 성공적으로 방위될 수 있는지 공산당원답게 솔직히 이야기하라고 물었다. 주코프는 가능하지만, 예비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대답했다.<ref name="Zhukov28" /> 11월 28일까지 독일 제7기갑사단은 최후의 주된 장애물의 하나인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고 클레믈린으로부터 35km 근방까지 와 있었다.
툴라 근방의 남쪽에서는, 11월 18일 제2기갑군이 공세를 재개하여 시를 포위하려 시도하였다.
모스크바 북방과 남방의 저항때문에 12월 1일 독일군은 나로포민스크 근방에서 민스크-모스크바 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에 대한 정면공격을 행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한정된 전차 지원하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방위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소련 제1 친위자동차화보병사단의 완강한 저항과 33군의 측면공격을 받아서 독일군은 1만명의 손실과 수십대의 전차를 잃고 4일후 후퇴했다.
12월 초까지 기온은 영하 15-20도 이하로 떨어져 러시아 기준으로는 상대적으로 심한 편은 아니었다 <ref name="GlantzDecCounter">Glantz, ch.6, subchapter "December counteroffensive", p.86 and following.</ref> 그러나 동계의복이 부족한 독일군과 이런 추위에 대한 설계가 고려되지 않은 독일 차량은 얼어붙었다. 독일군은 13만명이 넘는 동상환자가 발생했다고 보고되었다.
== 소련군의 반격 ==
[[파일:
독일군의 공세가 정지되었지만, 독일 정보부대는 소련은 예비병력이 없고 반격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예상은 오류로 드러났는데, 스탈린이 일본에 있던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것이라는 보고를 해옴에 따라 시베리아와 극동으로부터 완비된 사단들을 모스크바 방면으로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바실레프스키와 주코프가 세운 반격계획을 스탈린이 승인한 12월 초까지<ref>Zhukov, tome 2, p.37</ref> 58개 사단규모의 예비병력을 편성했다.
[[파일:Soviet Offensive Moscow December 1941.jpg|thumb|right|350px|1941년 12월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반격하는 소련군 부대]]
같은 날 히틀러는 총통 지령 제39호에 서명했다. 이것은 독일군이 모든 전선에서 현재의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현재 위치에서 굳건한 방위태세를 조직할 수 없었고,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구데리안은 공군의 [[한스 슈미트]]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조차 현재의 위치를 사수할 수 없다는 것을 동의했다고 썼다.
그동안, 소련군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북쪽에서는 칼리닌 전선군이 서진함에 따라 클린과 칼리닌이 12월 15일,16일에 각각 해방되었다. 소련군 사령관 [[코네프]]는 독일 중앙집단군을 포위하려고 했으나 르제프에서 강한 저항을 받아서 일단 정지했고 1943년까지 지속되는 돌출부를 형성하였다. 남쪽에서도 공세는 순조로워 서남전선군이 12월 16일 툴라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정면에서는 진전이 느려서 열흘정도의 격렬한 전투 끝에 12월 26일 나로포민스크를, 28일에는 칼루가를, 다음해 1월 2일에 말로야로슬라베츠를 해방시켰다.<ref name="MosEnc" /> 소련군 예비병력은 급속히 저하되고 있었고 추위에 얼어붙고 소진된 독일군을 100-250Km정도 후퇴시킨 끝에 1942년 1월 7일 공세는 정지되었다. 이 승리는 독일군의 첫 번째 패배로서 소련의 사기를 충천시켰다. 소련을 빠른 일격에 해체시키려고 했던 계획이 실패한 후 독일군은 장기전을 준비하게 된다. 모스크바에 대한 전격전은 실패했다.
== 결과와 영향 ==
[[파일:
소련군의 동계반격은 독일군을 모스크바로부터 몰아냈지만, 전선에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에 모스크바는 아직 위험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는 독일군 공세의 초기 성공에 놀란 스탈린에게 있어 최우선적으로 방위해야할 목표였다. 특히 소련군의 초기 반격은 독일군 중부집단군의 수 개 사단이 고수하던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소련군은 르제프 돌출부에 대해 즉시 수차례 공격을 했지만 ([[르제프 전투]]) 매번 양측에 큰 손실을 입힌반면 전선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소련의 손실은 50만명에서 100만명에 이르고 독일군 손실은 30만 명에서 45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된다. 1943년 초가 되어야 독일군은 전선이 서부로 이동함에 따라 이 돌출부에서 물러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몰렌스크 전투 (1943년)|1943년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드네프르 강]] 상류 좌안과 스몰렌스크 육교에서 결정적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이 물러나는 1943년 10월까지 모스크바는 확실히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작전이 실패한데 격노하여 육군총사령관 [[브라우히취]]를 1942년 12월 19일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취임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를 통해 군사적 결정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고 자신에 고분고분 하지 않은 장교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히틀러 자신은 경험이 전무하거나 아주 적은 참모장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이것은 우리들(총통과 나)을 서먹하게 했고, 이 서먹한 관계는 후에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고 썼다.
1941년 6월 이래 처음으로 소련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정지시켰고 물러서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스탈린을 지나치게 자신감에 충만하게 하여 공세를 확장시키게 했다. 1942년 1월 5일 크레믈린에서 열린 군사회의에서 스탈린은 모스크바 근방, 레닌그라드, 남부러시아를 포괄한 대규모의 춘계반격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코프는 이런 계획에 반대했지만 결국 실행되었다.<ref>Zhukov, tome 2, p.43–44</ref> 그러나 소련군의 부족한 예비병력과 독일군의 노련한 전술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내고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르제프 전투). 그리고 [[제2차 하르코프 전투]] 패배, 독일군이 갇힌 [[데미안스크 고립지대]] 제거 실패, [[레닌그라드 포위]]를 뚫으려던 [[블라소프]]군의 패배등의 일련의 실패가 계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패배들은 오히려 독일군의 성공적인 남부공략과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사수는 추축군 침략자에 대한 소련군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1965년 [[유럽전승리 기념일]] 20주년에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다.<ref name="MosEnc" /> "모스크바 방위" 훈장은 1944년 제정되어 전투에 참여한 병사, 시민, [[소련 파르티잔]]에 수여되었다.
== 쌍방 손실 ==
모스크바 공방전중의 독일군과 소련군의 손실은 각기 여러자료들의 다른 추정치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들이 모스크바 공방전의 기간 설정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전투의 시작을 1941년 9월 30일(때때로 10월 2일)의 태풍작전 개시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공방전의 종료일에 대해서 두가지 다른 설이 있다. 특히 에릭슨같은 사람 <ref name="Erickson">John Erickson, ''Barbarossa: The Axis and the Allies'', table 12.4</ref> 과 글란츠는 <ref name="GlantzB">Glantz, Table B</ref>는 르제프 공세를 이 전투의 범위에서 빼서, 1942년 1월 7일을 종료일로 잡아 사상자 수를 적게 계산하였다. 르제프와 뱌지마 작전을 작전의 범위에 넣은 역사가들은 좀 더 사상자수를 높게 추산한다.<ref name="MosEnc" /><ref name="GSEMoscow" /> 르제프 작전이 1942년 1월 8일 시작되어 이전의 전투들로부터 휴지기 없이 전투가 계속되었으므로 이런 태도는 이해될 만하다.
여러 자료에 따른 사상자의 수치도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에릭슨은 그의 책 "바르바로사(Barbarossa: The Axis and the Allies)"에서 1941년 10월과 1942년 1월 사이에 소련군은 653,924 명의 인명손실을 냈다고 밝혔다.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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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asilevsky, A. M. (1981). ''Lifelong cause''. Moscow: Progress. ISBN 0-7147-1830-0.
* Zhukov, G. K. (1971). ''The memoirs of Marshal Zhukov''. London: Cape. ISBN 0-224-61924-1.
{{독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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