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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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프락치사건국회 프락치 사건'''은 [[1949년]] [[5월 20일]]부터 [[6월 20일]]즈음까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다수가국회의원들이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프락치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실형을 받은 과정을사건으로, 이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관련 서류가 소실되고 대부분의 피고인이 월북하는 등으로 인하여 항소심이 진행되지 아우르는않고 사건이다종료되었다.
 
* [[1949년]] [[5월 20일]],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인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ref> 김삼웅, 《한국현대사 바로잡기》(가람기획, 1998) 10~11쪽. </ref>
== 경위 ==
* [[1949년]] [[6월 20일]]부터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김병회]] 등의 국회의원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역시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증거는 없었으며, 조작의 냄새가 짙은 사건이었다. <ref>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지음, 〈출발부터 휘청거리는 의회정치〉《한국현대사이야기주머니 1》(녹두, 1993) 153쪽. </ref>
* [[1949년]] 3월경, [[서울특별시]] 경찰국으로부터 국회의 동성회·일민두락부 등에 소속된 소장파 의원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은 [[서울지방검찰청|서울지검]] 장재갑 부장검사와 오제도 검사는 서울시경 최운하 사찰과장을 중심으로 특별사찰반을 편성하여 내사를 개시하였다.
*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조사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3개월 간 지속된 심리에서 국회의원들은 최고 10년에서 최하 3년까지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실형을 살던 중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모두 석방되었다. <ref> 김삼웅, 《한국현대사 바로잡기》(가람기획, 1998) 12쪽.;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지음, 〈출발부터 휘청거리는 의회정치〉《한국현대사이야기주머니 1》(녹두, 1993) 159쪽. </ref>
* [[1949년]] [[5월 20일]], 검찰은 자수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원 전우겸의 진술을 받아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을 구속하였다. 혐의는 남로당과 연계하여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 [[1949년]] [[5월 21일]], [[대한민국 국회|국회]]는 임시국회를 소집하고 이들 의원에 대한 석방결의동의안을 상정하였으나 부결되었다.
* [[1949년]] [[6월 10일]], 월북을 시도한 남로당의 여성 특수공작원 정재한이 [[개성시|개성]]에서 검거되었다. 이를 계기로 [[6월 20일]]부터 다시 수사망을 통해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김병회]] 등의 국회의원과 변호사 오관을 구속하고, [[8월 16일]]까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그러나 노일환 등의 국회의원을 구속하게 된 유일한 증거가 된 여성 특수공작원 정재한은 피고인들과 변호인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ref>〈제헌국회프락치사건의 진상 1〉, 《민족통일》 1989년 1·2월호, 53쪽.; 《이것이 국회다》, 이호진, 강인섭, 삼성출판사, 88~89쪽.</ref>. 당시 미대사관 문정관으로 근무하던 핸더슨은 이 사건을 조사·방청한 결과 정재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ref>〈우리역사 바로알자 국회프락치사건, 사실인가〉, 박원순, 《역사비평》 1989년 가을호(통권 8호), 역사문제연구소(역사비평사).</ref>.
* 국회 프락치 사건은 15회에 걸친 공판 끝에 [[1950년]] [[3월 14일]], [[서울지방법원]]에서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하였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심시를 진행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피고인들이 탈주하면서 사건이 종료되었다<ref>《서울지방검찰사》, 서울지방검찰청, 1985.</ref>.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석방되었다는 지적도 있다<ref> 《한국현대사 바로잡기》, 김삼웅, 가람기획, 1998., 12쪽.; 〈출발부터 휘청거리는 의회정치〉《한국현대사이야기주머니 1》,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지음, 녹두, 1993., 159쪽.</ref>.
 
==각주==
<references/>
 
[[분류: 제1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