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보이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kang (토론 | 기여)
Chokang (토론 | 기여)
7번째 줄:
1945년에는 독일 쿡스하벤(Cuxhaven)의 영국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전쟁이 끝나고 1946년에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클레베로 귀향하였다.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산전수전을 겪은 그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47년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쿤스트아카데미 뒤셀도르프]]Kunstakademie Düsseldorf)에 입학하여 조각을 공부하였다. 1950년대 초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953년 부페르탈(Wuppertal)에 있는 폰 더 하이트 박물관(Von der Heydt Museum)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61년에 그는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조각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플럭서스]](Fluxus)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1963년 플럭서스 페스티벌에서 그의 첫 행위 예술(Performance)인 <플럭서스 시베리안 심포니 1악장>이 행해졌다. 그 후 보이스는 평생 동안 약 70여 회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국내외적으로 그의 명성을 떨쳤다.
[[파일:플럭서스 시베리안 심포니 1악장.jpg|섬네일|왼쪽|플럭서스 시베리안 심포니 1악장]]
그는 사회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예술로 사회를 변화시키려 함은 물론,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67년에 학생들의 요구를 대변해주는 독일 학생당(DSP)을 창당하였고, 1972년 카셀 [[도큐멘타전|도큐멘타]] 5(Documenta V)에서는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 박물관 안에 ‘국민투표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 조직’이라는 사무실을 열어 100일 동안 민주주의, 예술에 대해 강연하고 관람객들과 토론하였다. 1976년에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고, 197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녹색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보이스는 교육에 있어서도 그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1971년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 안에 자유 국제 대학(FIU: Freie Internationale Universitaet)을 설립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또, 아카데미 입학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들을 입학시키기 위해 아카데미 사무실을 점거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972년에도 낙방한 학생들의 입학 허가를 받아 내려 또 한 번 사무실을 점거하며 시위하다가 결국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979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보이스의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어 그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떨쳐졌다. 1982년에 보이스는 카셀 시에 7000그루의 나무를 심는 환경운동이자 퍼포먼스의 일종인 <7000그루 참나무>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보이스는 1986년 1월 23일 뒤셀도르프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였으며, 이듬해인 1987년 그의 아들인 벤젤(Wenzel)이 마지막 7000번째 나무를 심으며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파일:7000그루 참나무.jpg|섬네일|오른쪽|7000그루 참나무]]
 
== 예술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