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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숙종]] 20년([[1694년]]) [[음력 3월 23일]], [[민암]](閔黯)이 한성 내 노·소론가의 자제들이 재물을 모아 환관(宦官)·폐인(嬖人)<ref group="주석">폐인(嬖人)은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일컫는 단어로
3월 26일, [[한중혁]](韓重爀)·[[김춘택]](金春澤)·이진명(李震明)·이후성(李後成)·이기정(李起貞)·김도명(金道明)·이동번(李東蕃)·변진영(邊震英)·유복기(兪復基)·이시도(李時棹)·이시회(李時檜) 등이 체포되었다. 이 중, 지방 거부(巨富) 출신 무인(武人) [[이시도]]가 '[[한중혁]]([[소론]]) 부자(父子)가 [[남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남인]]의 삼대장(三大將: 훈련 도감·수어영·금위영)이 종실 [[의원군]]을 왕으로 세울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하려고 했다. [[한중혁]]은 이 계획을 [[동평군]]이 알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다고도 했다.'고 거짓 토설을 하니, [[조선 숙종|숙종]]은 분개하여 이시도를 더욱 엄히 고문할 것을 허가하고 국청을
3월 29일, 유생 김인이 고변서를 올려 신천 군수(信川郡守) 윤희(尹憘)와 훈국 별장(訓局別將) 성호빈(成虎彬) 등이 반역(反逆)을 도모하는데 장희재도 참여하였으며, 민암(閔黯)·오시복(吳始復)·목창명(睦昌明)도 서로 연결(連結)되어 있는 것을 직접 들은 것과 장희재가 1693년에 [[숙빈 최씨]](당시 숙원)의 외숙모 일가에게 돈을 주고 회임 중인 최씨를 독살토록 사주하는 것을 자신이 목격했다고 고발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9일(정묘) 1번째기사 </ref> 이에, [[민암]]·[[장희재]] 등이 [[조선 숙종|숙종]]에게 억울함을 토로하였으며 [[조선 숙종|숙종]]은 김인의 고변이 허황되어 믿지 않는다며 이들을 위로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9일(정묘) 3번째기사 </ref>
그러나 다음날인 음력 4월 1일<ref group="주석">1694년은 윤달 탓에 음력 29일이 3월의 마지막 날이다.</ref>, [[조선 숙종|숙종]]은 돌연 [[민암]] 등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축출하고 [[서인]]에게 다시 정권을 주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한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1번째기사~5번째기사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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