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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thumb|right|호광총독 재임시의 단방 '''단방'''({{zh-cp|c=端方|p=Duānfāng|h=돤팡}}, 1861년 ~ 1911년)은 말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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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만주족|만주]]정백[[팔기군|기인]]으로 탁특극(托忒克)씨이다. 1861년 4월 20일 단방은 [[직예]]의 [[만주족|만주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1882년]]에 [[거인 (신분)|거인]]이 되어, 원외랑, 후보낭중을 역임했다. [[변법자강 운동]]을 지지했으나 무술정변 이후에 [[영록]]과 [[이연영]]의 보호를 받아 처벌을 면했다. [[1898년]] [[직예]]패창도에 임명되었지만, 조정이 [[베이징 시|북경]]에 농공상국을 창설하면서 단방이 소화되어 국무를 맡았다. 이 때 「권선가」(勸善歌)를 제안해 [[서태후]]의 칭찬을 받고, 삼풍정대를 받았다.
 
그 뒤 [[산시 성 (섬서성)|섬서성]]에 파견되어 안찰사, 포정사, 순무대리를 역임했다.[[1900년]] [[의화단의 난]]으로 인해 북경이 8개국 연합군에 점령되어 서태후와 [[광서제]]가 섬서성의 [[시안 시|서안]]에 대피했다. 단방은 그 대응에 공적이 있다고 여겨져 하남포정사에 임명되었고, 그 뒤 호북순무로 승진하였다. [[1902년]]에 [[호광총독]] 대리가 되고, 다시 [[양강총독]] 대리 겸 호남순무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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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북경에 귀환되어 [[민절총독]]에 임명되었다. 취임하기 전에, [[재택]](載澤)·[[대홍자]](戴鴻慈)·[[서세창]](徐世昌)·[[소영]](紹英)과 함께 외국에 입헌 제도를 시찰하도록 명령받았다(다만 출발일에 혁명파인 [[오월 (혁명가)|오월]](吳樾)의 자폭 테러로 인해, 출발은 연기되어 서세창·소영이 이성탁·상기형과 교대했다). 12월 7일, 군함으로 [[친황다오 시|진황도]]에서 출발하여 [[상하이 시|상해]]로 간 뒤, 12월 19일 미국 선박으로 상해에서 출발했다. 5인의 대신은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10개국을 시찰한 뒤 다음 해 8월에 귀국했다. 귀국후 시찰 결과를 총괄한 「청정국시이안대계절」(請定國是以安大計折)를 상주하여,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스스로 편찬한 「구미정치요의」(歐美政治要義)를 또한 헌상했다. 이것은 입헌 운동의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귀국후 양강총독이 되었다가 [[1909년]] [[직례총독직예총독]]이 되었다. [[1911년]]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에 반대해 [[쓰촨 성|사천성]]에서 보로운동이[[보로 운동]]이 전개되어, 조정에서 9월 [[사천총독]] [[조이풍]](趙爾豊)을 해임한 뒤 단방에게 총독 대리를 명했다. 단방은 신군을 인솔하여 [[네이장 시|자주]]에 들어갔지만, 11월 27일에 신군의 반란이 일어나 단방은 척살되었다.
 
==교육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