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펠릭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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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년]] [[7월 28일]] 로마 교회회의에서 펠릭스 3세는 아카치우스를 파문하고 해임시켰으며 사절들의 업무를 정지시켰다. 그 형벌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정통파 아코이메토이 수도자들이 펼친 과감한 운동을 통하여 전파되었다. 그러자 아카키우스는 펠릭스 3세의 이름을 목록에서 제거하게 했다. 이리하여 시작된 아카키우스 분열은 그 후 35년간이나 지속되어 동서 교회가 처음으로 심각한 분열을 맞게 되었다. [[489년]] 아카키우스가 죽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그 분쟁을 종식시키려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펠릭스 3세는 〈헤노티콘〉을 부가한 황제를 파문하지는 않았으나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통상적인 어투를 벗어난 강한 어투로 경고하였다. 이어서 그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교회]]의 우위성을 기탄 없이 강조함으로써 교황과 황제 사이에 장기간 분쟁이 지속되었다.
|전임자=[[교황 심플리치오|심플리치오]]
▲{{전임후임|
▲대수=48|
▲직책=[[역대 교황|교황]]|
▲임기=[[483년]] [[3월 13일]] - [[492년]] [[3월 1일]]|
}}
[[분류:
[[분류:
[[분류:이탈리아 출신 교황]]
[[분류:성인 교황]]
[[분류:5세기 기독교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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