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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주있는 건축기술자로 알려져있다. 발명하기에만 열중하는 아버지라 가정의 살림은 나날이 빈궁에 빠져 들어갔다. 1837년 노벨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기계공장을 세우고 처음에는 번창하였다. 18세(1851년)에 [[미국]]에 유학하여 4년간 기계공학과 화학을 공부하였다. [[크림 전쟁|크리미아 전쟁]](1853~56년)에 러시아가 패전하는 바람에 노벨의 아버지 공장도 파산하고야 말았다. 아버지는 스웨덴으로 돌아가고 노벨은 형님 두분과 함께 그냥 러시아에 머물러서 연구를 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너마이트의 연구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후에 다시 노벨은 스톡홀름에 돌아왔다. 이때 노벨은 혼자서 연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도 좋은 공동연구자였다. 스톡홀름의 공장이 폭발할 때는 노벨의 동생 에밀이 희생한 일까지 있었다.
 
[[나이트로글리세린|니트로글리세린]]을 연구하고, 이를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 1867년에 특허를 얻었다. 1869년부터 파리 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념하여, 1875년 무산 화약 [[발리스타이트]]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발명 및 특허에 의해 그의 가문은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ref name=autogenerated1>{{글로벌2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그러나 만년에 들어선 노벨의 마음은 슬펐다. 자기가 발명한 다이나마이트가 새 문명을 건설해가는 어려운 공사에 이바지되는 것은 기뻤으나 전쟁에 이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노벨의 평화에 대한 갈구는 아주 컸다. 그래서 자기 여비서가 평화운동에 참가해서 일할 때는 많은 돈으로 원조해 주기도 하였다.
 
1896년 12월 10일 숨을 거두기 일년전 유명한 유언장을 남겼다. 자기 재산에서 생기는 이자로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 부문에 걸쳐 공헌이 있는 사람에 상을 주라는 유언이다.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염원해 오던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은 [[스웨덴 왕립 과학원|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기부되었다. 그 기부금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 제도가 설정되었다. 이 상은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경제학·평화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국적 및 성별에 관계없이 그 부문에서 뚜렷한 공로자에게 매년 수여되고 있다. <ref name=autogenerated1 />
 
노벨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인물로 남아 있다. 비상하면서도 고독하고, 비관주의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현대전에 사용된 강력한 폭탄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 이바지한 지적인 업적에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노벨이 열아홉살 때 외국 유학 도중 프랑스에서 한 여인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 후 이 소녀는 죽고 말았다. 이 죽음의 상처로 노벨은 재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1896년]] [[이탈리아]] [[산레모]]의 별장에서 여생을 마쳤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62600329104010&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0-06-26&officeId=00032&pageNo=4&printNo=4387&publishType=00010 | 제목 = 정신의 거인(4) |저자= [[김요섭]] | 작성일자 = 1960-6-26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그의 생애와 노벨상과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을 다루는 [[노벨 박물관]]은 스톡홀름의 구 시가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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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DEFAULTSORT:노벨, 알프레드}}
{{토막글|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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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833년 태어남]]
[[분류:1896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