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시게모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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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글씨'''[[파일:Taira Shigemori.jpg|thumb|right|타이라 노 시게모리]]
'''타이라다이라 노 시게모리'''({{ja-y|平重盛|たいら の しげもり|타이라 노 시게모리}}, [[1138년]] ~ [[1179년]] [[9월 2일]])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 공경이다.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적남. 로쿠하라(六波羅) 고마쓰다이(小松第)에 거처를 두었으므로 '''고마쓰도노(小松殿)''', 또는 '''고마쓰나이다이진(小松內大臣)''', 또는 그 저택에 48개의 등롱을 세워둔 것에서 따온 '''도로다이진(灯籠大臣)''' 등으로 불렸다.
 
호겐(保元)의 난과 헤이지(平治)의 난에서 아버지 기요모리를 도와 잇달아 전공을 올렸고, 기요모리의 입신과 더불어 승진, 사코노에다이쇼(左近衛大將)에 정2위 [[나이다이진|나이다이진(內大臣)]]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기요모리의 맏아들이었지만 기요모리의 후처 도키코(時子)의 아들인 무네모리(宗盛)나 도쿠코(德子)와는 달리 유력한 외척의 비호가 없었고, 아내 쓰네코(經子)의 오빠이자 그의 처남인 후지와라노 나리치카(藤原成親)가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견제하려다 실각당한 뒤에는 일문 안에서 고립되는 분위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다이라 씨|헤이시(平氏)]] 일문 중에서는 [[고시라카와 천황|고시라카와(後白河) 법황(法皇)]]과 가장 가까운 입장이었다. 기요모리의 후계자로서 기대를 받으면서도, 기요모리와 법황의 대립에서는 어떻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아버지보다 먼저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