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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弘文館)은 [[조선]]의 행정기관이자 연구기관으로, [[예조]]의 속아문이다. [[대간|삼사]]의 하나로
왕궁 서고에 보관된 도서를 관리하고 문학관계의 일을 전공하며 임금의 물음에 응하였다. 조선에서 경전에 나오는 옛 사람들이 행한 정치를 연구하고 군주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졌으므로 홍문관은 조선 정치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관원은 모두 문관이었으며, 모두 [[경연]]의 관직을 겸임하였고, 부제학부터 부수찬까지는 모두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조선시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으로서 정승·판서 등 고위 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곳을 거쳐갔다.
==역사==
[[고려]] [[공민왕]] 5년([[1356년]])에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ref>동사강목 도하 관직 연혁도 학사 연혁.</ref>. 이후에도 간간이 폐하고, 다시 설치하던 것을 [[조선]] [[조선 세종|세종]] 2년([[1420년]])에 확대·개편하였다<ref>《세종실록》 권7, 세종 2년 3월 16일 갑신일 조.</ref>. 이전까지는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나 이때부터 청사를 가지고, 경전과 역사의 강론과 임금의 자문을 담당하였다. 무관도 문관에 예를 다해야 하는 곳이 있음을 크게 표하고 그 뜻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후에
[[조선 성종|성종]] 9년([[1478년]]) [[3월 19일]]에 다시 예문관 부제학 이하의 각원을 홍문관의 관직으로 옮겨 임명하게 하여 예문관을 분리·개편하였다<ref>《성종실록》 권90, 성종 9년 3월 19일 신사일 조.</ref>. 융희 1년(1907)에 홍문관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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