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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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과 신념 ==
그는 해방 이후 오랫동안 한반도가 황폐화된 것이 전적으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탓이라고 규정했다. 46년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 영향을 분석하면서 "일본 침략자본 세력의 급속한 총체적 파괴 과정에서 조선 경제는 대부분의 조선민중을 프롤레타리아트로[[프롤레타리아]]로 만들었다.<ref name="buuk113"/>"고 말했다. 당시 조선 백성들이 가난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일제와 총독부의 가혹한 수탈과 세금 독촉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통해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이 깨어났다.<ref name="buuk113"/>"며 그는 조선에서 계급투쟁의 언어는 곧 반식민주의 민족투쟁의 언어라고 주장했다.<ref name="buuk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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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작가 [[천세봉]]의 조선의 봄에서는 그는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ref name="sangheo"/>
 
동시대를 살던 [[북한]]의 역사학자 [[이청원]](李淸源)은 그를 소부르주아라 비판하였다.<ref name="leeso233">한국역사연구회, 북한의 역사 만들기 (푸른역사, 2003) 233페이지</ref> 그에 의하면 "[[맑스 레닌주의]]의 전략, 전술을 조선 혁명 운동에 실지로 정확하게 적용하지 못했으며 민족해방운동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정치적, 조직적으로 실현할 만큼 그런 진실한 [[공산주의]]자로 되지 못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ML파 출신이자 연안파의 일원이기도 했던 최창익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볼수 있다.<ref name="leeso233"/>
 
또한 [[김일성]]의 [[주체]]화를 거부한 점 역시 부정적 평가의 요인이 됐다. '절대자와 가까이 있음에도 교양이 불가능한 위치와 파벌을 지닌 인물<ref>상허학회, 총서 불멸의 역사와 북한문학 (깊은샘, 2008) 63페이지</ref>'이라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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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북한]]의 역사학자 석윤기는 자신의 소설 [[봄우뢰]]에서 그가 '안영호의 애인을 빼앗아 도피한 후 그녀를 버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ref name="sangheo"/>'는 내용을 언급하였다.
 
== 주석 ==
<references />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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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책]]
{{col-end}}
 
== 주석 ==
<references />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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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전임후임|
 
{{전임후임|
|전임자 = -
|후임자 = [[윤공흠]]
|대수 = 1
|직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정성|재정상]]
|임기 = [[1958년]] [[9월]] ~ [[1952년]] [[11월]]
}}
{{전임후임|
|전임자 = [[박헌영]], [[홍명희]], [[김책]]
|후임자 = [[홍명희]], 최창익, [[박창옥]]
|대수 = 2
|직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총리|부총리]]([[홍명희]], [[박헌영]], [[허가이]]와 공동)
|임기 = [[1952년]] ~ [[1953년]] [[3월 31일]]
}}
{{전임후임|
|전임자 = [[박헌영]], [[홍명희]], 최창익, [[허가이]]
|후임자 = [[홍명희]]
|대수 = 3
|직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총리|부총리]]([[홍명희]], [[박창옥]]와 공동)
|임기 = [[1953년]] [[3월 31일]] ~ [[1956년]] [[9월]]
}}
{{전임후임|
|전임자 =
|후임자 = [[이주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주연]]
|대수 =
|직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정성|재정상]]
|임기 = [[1953년]] [[2월]] ~ [[1954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