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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남궁염.jpg|썸네일|오른쪽|남궁염]]
'''남궁염'''(南宮炎, [[1888년]] [[3월 17일]] ~ [[1961년]] [[11월 29일]], 미국명 데이비드 남궁(David Y. Namkoong))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겸 외교관이다. [[대한인동지회]] 뉴욕시 지부의 지부장이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1960년]] [[6월]]까지 제1대 뉴욕 한국 총영사관 총영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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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염은 이승만의 독립운동 뒷바라지와 함께 뉴욕동지회를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동지회 뉴욕지부를 지도하였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남들처럼 귀국하지 않고 뉴욕 한인회를 지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히 뉴욕총영사가 되어 활동했다.<ref>"정부인사발령", 동아일보 1949년 02월 23일자 1면, 정치면</ref> 한편 그의 부인 우복자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동지회의 지부장이 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매년 하순 혹은 가을에 개최되는 미국내 한인대회에 반드시 참석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체의 비용을 받지 못하였으나 자신이 활동비를 조달하고 영사관 건물을 마련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청빈한 외교관이었으나 한인 교민들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5년]] [[7월 8일]]에는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兼任理事官)에 임명되었다.<ref>"정부인사발령", 경향신문 1955년 07월 08일자 1면, 정치면</ref> [[1960년]] 4.19가 터지자 이승만의 사퇴 후 그해 [[6월]] 그도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하와이로 은퇴하였다. 사직서는 그해 [[7월 14일]]에 수리되었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61년]] [[11월 29일]]에 사망하였다.<ref name="soso">[http://www.koreatimes.com/article/657096 뉴욕한인 이야기/ 남궁염 초대 뉴욕총영사] 미주한국일보</ref>
 
=== 사후 ===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74년에 환국하였다. 유골은 [[강원도]] [[홍천]] 선영에 묻혔다.<ref name="soso"/>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아들 준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미우주항공국 리서치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었고 딸 혜원(54)은 아시아개발은행에 근무하던 민병휘와 결혼, 필리핀 마닐라에서 인터내셔널 스쿨의 카운슬러로 있었다.<ref name="soso"/> 아들 진은 미농무성 산림국 육종고문으로 있으면서 당시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임목육종학 교수로 재직하였다.<ref name="soso"/>
 
== 가족 관계 ==
* 부인 : 우복자([[1899년]] - ?)
** 아들 : 남궁준([[1924년]] - )
** 딸 : 남궁혜원([[1930년]] - )
** 아들 : 남궁진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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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고리 ==
* [http://usa-newyork.mofa.go.kr/korean/am/usa-newyork/main/index.jsp 주 뉴욕 총영사관]
* [http://www.koreatimes.com/article/657096 뉴욕한인 이야기/ 남궁염 초대 뉴욕총영사] 미주한국일보
 
[[분류:1883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