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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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소수 종족들은 아웅산이 약속했던 자치주의 실현을 요구하고 무장 공산주의자들의 공산정권 수립을 주장하는 등 이념과 정파별로 정쟁이 계속되면서 버마민주공화국 건국을 혼란으로 몰고 간다.
 
대표적인 세력들은 아웅 산 등이 결성하고 독립 후 집권여당이 된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 점진적 공산정권 수립을 주장하는 트로츠키류의 백기파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한 CPB(Communist Party of Burma), 즉각적인 공산정권 수립을 외치던 스탈린의 적기파 BCP(Burmese Communist Party)와 이와 같은 공산당에서 이탈하여 정식 미얀마 연방군에 흡수되지 못한 인민 의용군(PVO), [[카렌족]]을 대표하는 카렌 민족 방위군(KNDO)과 [[샨족]], [[몬족]], 카렌족 등 소수민족의 세력들이 이합집산의 형태로 조직화하거나 세력화 하였다세력화하였다.
 
우 누 수상은 공산주의자들을 제도권내로제도권 내로 흡수하고 소수종족의 자치를 약속하는 등 폭동을 진정 시키려진정시키려 하지만 이는 연방 분열 불가를 주장하는 군부로부터 불신을 사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웅 산과 초대 수상이 된 우 누 등 독립 민족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제국주의와 동일시 하며동일시하며 식민잔재를 철패하고 평등사회 구축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뜻은 같이 하였으나 아웅산은 종교를 배제한 대신 우 누 수상은 '불교교리가 바로 사회주의 이론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미얀마인의 가치추구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에 기초한 정신 세계이며 그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이며 불교 사회주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54년 우 누 수상은 복지 국가론을 주창하며 그 실현을 위하여 산업 국유화의 전단계로 농지 국유화 등 정책을 펴지만 오히려 경제 위축만 가져오고 실패 하고실패하고 만다.
 
한편 선거 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친여 성향의 상공인과 결탁하고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지도력을 상실하면서 여권이 분열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고 이러한 혼란 상황에 공산당과 꺼인 반군의 제휴로 내전이 확대되면서 결국 1958년 10월 군사령관인 네윈의 위기관리내각에 권력을 넘기고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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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여 동안 위기관리 내각을 맡았던 [[네윈]]은 정정을 안정시키고 1960년 공명정대한 선거를 통하여 다시 집권한 우 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으로 원대 복귀한다. 그러나 우 누는 불교 국가 복지론을 강조하는 정책을 펴 다시 새로운 내분으로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즉 우 누는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하는 불교국교화법 제정을 추진하면서 타 종교는 물론 소수종족별 심한 반발을 사면서 무장봉기를 확산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기독교, 무슬림, 토속 종교 등 전국적으로 종교적 저항에 부딪치면서 소수종족이 불교국교화법에 반대한다면 자치 연방제를 재고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소수종족의 무력 봉기를 부채질 하였다부채질하였다.
 
양곤 가톨릭 대주교의 종교 자유 보장책과 타종교 박해 방지 대책 없는 법제화 추진은 국민단합에 심대한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1961년 8월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불교국교화가 비불교도 및 소수종족의 심한 반발을 사자, 우 누는 제4차 헌법 개정안에 모든 종교의 자유화를 선언해 버리는데 이제는 불교 승려들의 반발을 초래 하였고초래하였고 반 회교 폭동이 발생했다. 나아가 1961년 3월 1일 소수종족에 대한 자치권을 의회에서 논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불교 국교화를 무색케 할 뿐만 아니라 국토의 분할을 용납 할 수 없다는 네윈을 비롯한 군부의 반발에 부딪치면서 마침내 다음날 3월 2일 쿠데타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 결과 버마민주공화국은 붕괴 되었다붕괴되었다.
 
1983년, [[아웅 산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공작원들이 한국 대통령및 각료들을 암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문장소였던 아웅 산의 묘소에 설치한 폭탄이 터져 [[한국인]]각료와 미얀마인 다수가 살상된 사건으로, 사건 당시에 한국(남한)측은 미얀마가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미얀마당국이 연관된 것으로 오해하였으나, 사건을 조사한 미얀마정부가 [[북한]] 외교관을 추방하고 국교를 단절함으로써 오해는 해소되었다. 아웅 산은 미얀마 독립의 영웅으로 대단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기에, 미얀마에서는 북한을 대대적으로 규탄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기도 하였다. 후일 네윈 장군은 한국(남한)에 답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