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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때 이미 자살 폭격을 옹호하는 선구적인 친일 활동을 했고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조직하여 비행기 헌납 운동을 벌였으며 여러 곳에 강연을 다니며 침략 전쟁을 지원할 것을 역설하거나 중국 전선의 부대를 방문하여 군인들을 위문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국방비를 거듭 헌납하고 [[의용단]] 모집에 앞장섰으며 [[1943년]]에는 비행기 뿐 아니라 배를 기부하자는 이른바 헌함(獻艦) 운동을 벌이고 솔선수범하며 광산을 기증했다.
 
단순한 친일파와는 달리 일본의 [[신토]]를 깊이 믿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일본 개국 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위한 소형 감실인 [[가미다나]]를 집에 설치하여 아침 저녁저녁마다 절을 했으며 이를 전국에 널리 퍼뜨리기 위해 가미다나를 집집마다 비치하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이러한 대가로 그에게 가미다나 독점판매권을독점 판매권을 주었다. [[1943년]]에는 친일단체 [[황도선양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의식주를 모두 일본식으로 따르고 가족들에게 집안에서도 일본어만 쓰도록 강요할 만큼 광신적인 모습을 과시했다. 반강제적인 [[창씨개명]] 정책에도 적극 협조하여 성과 이름을 바꾼 뒤 씨명을 새로 고른 과정과 이유를 기고하며 홍보 활동에 나섰다. 이러한 공으로 인해 그는 일제로부터 "애국옹(愛國翁)"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조선인들로부터는 "야만기(野蠻琦)"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1941년]] [[4월 21일]]부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