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바뀜

4 바이트 제거됨 ,  6년 전
잔글
편집 요약 없음
{{다른 뜻|충강공}}
'''우성전'''(禹性傳, [[1542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의병장<ref>[http://www.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48344 <nowiki>[우성전]</nowiki> 문신으로 의병장 활약… 임란때 강화등서 전공], 《수원일보》, 2010년 3월 22일 작성, 2011년 4월 6일 확인.</ref>, 군인, 정치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당색으로는 [[동인 (정치)|동인]]이었다가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안동시|안동]]에 [[역동서원]]을 세웠다. 시호는 충강(忠康)이다.
 
== 생애 ==
=== 동서 분당 ===
{{참고|정여립의 난|기축옥사}}
[[1589년]]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때 [[동인 (정치)|동인]]인사 2000명이 학살되자 [[동인]]은동인은 위관인 [[좌의정]] [[정철]]과 그의 스승 [[성혼]]에게 원한과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1591년]] 서인 [[정철]]이정철이 물러날 때 [[북인]]의 책동으로 그도 함께 삭직당했다. 우성전과 [[유성룡]]은 정승을 지낸 인물이라 처형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산해]], [[정인홍]] 등은 옥사의 위관으로 이발의 팔순 노모와 10세도 안된 어린 아들들을 장살시킨 가혹함을 지적하였다.
 
=== 임진왜란과 죽음 ===
== 기타 ==
=== 축첩과 분당 원인 ===
[[이발]], [[정인홍]] 등이 그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의혹이 한 원인이 되었다. 그는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ref name="deok68">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68페이지</ref> 그는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ref name="deok68"/>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ref name="deok68"/>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ref name="deok68"/><ref>정여립의 옥사 때 희생된 동인 강경파 이발이다.</ref> [[이발]]은 [[사헌부]][[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ref name="deok68"/>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ref name="deok68"/>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동인들은 이 것 역시 [[이이]]가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이이를 의심하였다.<ref name="deok68"/>
 
== 참조 ==

편집

4,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