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 (여성운동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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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만주 지린(吉林) 출신.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 지역을 떠돌다 아버지 사후 어머니와 함께 귀국해 [[평양]]에 정착했으나, [[1939년]]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 각가현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는 비운을 겪었다. 5개월 뒤 한 조선인 상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탈출했다.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고 마지막 의지의 대상이던 아들마저 초등학교 4학년 때 익사하자, 서울 종로구의 한 판잣집에 세들어 살며 온갖 궂은 일을 다했다. [[1990년]] 6월 일본이 '일본군은 군대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이에 격분해 폭로할 것을 결심했고, 1년 후에 실행에 옮겼다. [[1991년]] [[8월 14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국내 거주자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했다.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이 문제를 제소, 1994년 6월 6일 제9차 재판 진행 중 위안부 사실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했다. [[1993년]] 한국정신대문제연구회가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의 방한을 앞두고 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이라는 증언집에서 참담했던 자신의 위안부 생활을 구체적으로 공개해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항의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일본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했으며, 정신대 문제를 국제사회 문제로 확대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1995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애환을 다룬 연극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고, 1997년 12월 8일 평생 모은 약 2천만원을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해 써달라'며 자신이 다니던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기증했다. 1997년 12월 16일 서울 동대문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1700289130008&edtNo=7&printCount=1&publishDate=1997-12-17&officeId=00028&pageNo=30&printNo=3067&publishType=00010 한겨레신문, 위안부 최초 증언 김학순씨 별세]</ref> 충남 천안시 망향동산에[[국립망향의동산]]에 묻혔다.
 
== 일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