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제2차 만세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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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제2차 만세 운동''' 또는 '''경성 여학생 운동'''은 [[1929년]] [[광주]]에서의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의 성추행 사건에 반발하여 발생한 [[광주 학생 운동]]의 여파로 발생한 만세 운동이다. [[1929년]] [[12월]]에서 [[서울]]에서 [[이화여전]], [[숙명여학교]], [[배화여전]] 등의 여학생들이 동맹휴학하려던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자 [[1930년]] [[1월]] [[근우회]]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벌어진다.
 
[[1930년]] [[1월 15일]]에 이화여고보는 서울 시내의 다른 여학교들과 함께 연합 시위에 나섰다. 이화여고보 4학년 최복순(崔福順)이 [[근우회]] 간부 허정숙을 수 차례 찾아가 조언을 구하였으며 허정숙을 통해 경성 시내 이화여고보, 동덕여고보, 배화여고보, 숙명여고보, 경성여자미술학교, 경성실천여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태화여학교, 경성보육학교의 여학생들이 서로 규합하여 벌인 대규모 시위였다.<ref name="hanyeo357">한국여성문학학회,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소명출판, 2008) 357페이지</ref>
 
사전 발각된 [[1929년]] [[12월]]의 1차 만세 운동까지 합쳐서 '''경성 학생 만세 운동''' 또는 경성 여학생 운동으로 부른다. [[근우회]]와 [[신간회]]가 개입된 사건이며 [[근우회]] 주도로 벌어진 사건이라 하여 일명 '''근우회 사건'''으로도 부른다.
 
== 개요 ==
[[1930년]] [[1월]], 제2차 학생 시위를 주도한 근우회사건은 당시 근우회 서무부장 허정숙이 이화여고보의 [[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등 여학생들과 경성학생시위운동을 계획, 전개한 것이다.<ref name="shinyoung152">신영숙, 〈일제시기 여성운동가의 삶과 그 특성 연구:조신성과 허정숙을 중심으로〉역사학회, 《역사학보 150호 (1996년 6월호)》 (역사학회, 1996) 152페이지</ref> 이때 [[정칠성]], [[박차정]] 등도 함께 검거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ref name="shinyoung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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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
동아일보 [[1930년]] [[2월 20일]], [[3월 19일]], 23, 24, 26일자의 재판 상황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최복순외 7명에게 징역 7~8개월에서 집행유예 등으로 여학생이라는 점을 감안, 비교적 가볍게 해 주었다.<ref name="shinyoung153"/> 이 뒤를 잇는 동맹휴학은 [[1931년]]까지도 치열하게 전개되어 [[1930년]]~[[1931년]]에 걸쳐 백여 건의 동맹휴학이 있었다. 그러나 [[1932년]] 이후로는 동맹휴학이 급속히 감소하고 학생운동은 소수 정예의 [[사회주의]]적 비밀 결사 운동으로 이어졌다.<ref name="hanyeo357"/>
 
== 관련 항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