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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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13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재단법인이 재단법인 송도중학교로 바뀌자 송도중학교 재단법인 이사가 되었다.
 
[[4월 3일]] 다시 [[일본 제국|일본]] [[제국의회]] 칙선 귀족원의원에 [[귀족원 (일본)|귀족원 의원]]에 재선임되었다. [[1945년]] [[4월]] '조선내[[조선]]내 7인의 [[귀족원 (일본)|일본 귀족원]]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박중양 ]] 등과 함께 일본의[[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선임되었다.<ref name="gamsa">북악사학회, 《역사에 비춘 한국 근현대 인물》 (백악출판사, 1995) 99페이지</ref> 이어 [[박중양]]이 윤치호를 수행하여 [[인천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윤치호는 먼저 조선신궁에 봉고제를 올린 후 총독과 군사령관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이어 서울을[[서울]]을 출발, 일본으로[[일본]]으로 간 윤치호는 일본 관계 요로에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였다.<ref name="gamsa"/>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재추대되었다. [[8월 10일]] 광복 직전, 그는 개성의 광문암동 근처에 우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