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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당내에서도 3선개헌을 반대하는 일부 소장파 의원들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장기간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박정희]][[대통령]]의 연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공화당 내에서도 3선으로 용퇴하라는 여론이 빗발쳤고, 그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경제발전의 동력을 계속 이어나가야 된다며 3선 퇴진론에 맞섰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비토하면서 쏟아지던 비판은, 윤치영에게 쏠렸다.
 
[[1968년]] [[1월 18일]] 윤치영은 "[[민족중흥]]의 강력한 [[리더십]]을 위해 3선개헌을 하겠다"고 거듭 말했다.<ref name="3선2">송건호, 《송건호 전집 07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2002) 255페이지</ref>[[5월 7일]] 윤치영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위해선 박 [[대통령]]의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천명했다.<ref>이병주, 《그해 5월 6》(한길사, 2006) 39페이지</ref> 68년 [[12월 19일]] 개헌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윤치영 당 의장 서리가 한 지구당에서 행한 연설에서 흘러나왔다. 어느 조항인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윤치영은 개발도상국에서 근대화를 위해서는 "일당이 장기간 집권하는 것이 중요하다. <ref name="민준기154">민준기, 《한국의 정치발전 무엇이 문제인가》(을유문화사, 2003) 54페이지</ref>"고 선언했다. 윤치영은 [[개헌]] 문제야 말로 국제상황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ref name="민준기154">민준기, 《한국의 정치발전 무엇이 문제인가》(을유문화사, 2003) 54페이지</ref><ref>동아일보 1968년 12월 30일자 2면</ref> 그해 공화당 당의장 서리에 취임하였다.
 
그는 한국에는 한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한 법이라며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야당의 견해에 맞섰다. [[1969년]] [[4월 12일]] 윤치영은 공화당 의장서리 자격으로 반 당(黨) 행위를 조사하라는 총재 [[박정희]]의 지시를 받고 조사에 착수하였다.<ref>1969년 04월 12일자 경향신문 1면</ref> [[1969년]] [[8월 7일]] 윤치영 외 121명의 이름으로 된, [[박정희]] [[대통령]]에게 3선의 길을 터놓는 것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했다.<ref name="3선2"/> 야당의 반발 끝에 3선개헌안은 통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