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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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됐으며,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신임됐다.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10월 26일]]부터 [[1979년]] [[12월 5일]]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1979년]] [[12월 5일]]부터 [[1980년]] [[8월 15일]]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으나, 사실상 실권은 군사반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全斗煥) 장군이 맡았다.
 
그의 대통령 재직 시기에는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재직 초반부터 전두환 일대가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에는 민주화 시위가 터지기도 했다. 서울의 봄 이후에도 계속 통치하다가 [[1980년]] [[8월 15일]]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퇴임 후에는 [[박충훈]](朴忠勳) 국무총리 서리가 잠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영어]]를 가장 능통하게 구사한 인물은 [[이승만]] 다음으로 최규하가 꼽힌다.<ref name="disos127">송국건,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127페이지</ref>
 
[[강원도]] [[원주시|원주]] 출생이며 자(字)는 서옥(瑞玉)이고, 호(號)는 현석(玄石)이며, 본관은 [[강릉 최씨|강릉]](江陵)이며 부인은 [[홍기 (영부인)|홍기]](洪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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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2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33기로 졸업했다. 그의 경성제1고보 졸업 동기생은 [[이영섭]] [[대한민국의 대법원장|대법원장]] 등이 있다.<ref name="iidi40">조성관,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5) 40페이지</ref> 낙제를 하여 1년 유급되어 복학생이 된 [[민관식]]은 최규하와 함께 졸업장을 받았지만 그의 고교 1년 선배였다.<ref name="iidi40"/> 후일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을 때 그의 동창인 이영섭은 대법원장이었고, 졸업 동기인 [[민관식]]은 [[국회의장]] 직무대행 자격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어학 실력에 뛰어났던 그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영어]]를 제1언어처럼 사용했던 [[이승만]] 다음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대통령으로 꼽히기도 한다.<ref name="disos355">송국건,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355페이지</ref>
 
==== 교육 활동과 공직 진출 ====
그 뒤 [[일본]]으로 유학,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해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으며, [[1941년]] [[2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3월]] 만주로 건너가 [[만주]] 국립대동학원(國立大同學院) 정치행정반에 입학, [[1943년]] [[2월]] [[만주]]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수료하였다.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에 취임하여 교단에 섰다. 서울대 사대 교수로 재직 중 [[1946년]] [[미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면서 공직에 투신, 농림행정에 종사하게 됐다. [[1947년]] 중앙식량행정처 행정실장이 되었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에는 [[농림부]]로 보직되어 양정과장이 되었으며,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 등을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됐으며, 그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농림부차관 [[정흥구]]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했다.<ref>{{웹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9020020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9-02&officeId=00020&pageNo=2&printNo=8014&publishType=00020|제목 = 食糧農業會議에 韓國代表도 參加 |저자 = |출판사 = 동아일보사 |날짜 =1949-9-2 |인용문 = 오는 九월 廿六日부터 동 卅日까지 五日간에 걸쳐 “씽가폴”에서 열리는 極東亞細亞食糧農業會議에 초청을 받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표 二명을 파견하기로 되었는데 현 농림부차관 鄭求興씨와 양정과장 崔圭夏 양씨를 추천하였다 한다. }}</ref> 이 회의에서 그는 외국어 구사능력과 국제회의 대표로서의 활동력을 인정받아 인재의 적재적소 보임을 주장하던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에 의해 발탁됐다.<ref name="다음"/> 이후에는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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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의 사전 창당조직 연구팀과 사전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의 창립에 참여하였다.<ref name="leejae">이재오, 《한국 학생운동사》 (파라북스, 2011) 282페이지</ref> 5.16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인 [[1961년]] [[8월]]에 [[김종필]]은 민정인수 구상의 하나로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ref name="leejae"/> 이러한 공화당 사전조직은 [[박정희]]의 재가를 얻은 [[김종필]]의 새 정당 창당구상 연구팀으로, 책임자는 예비역 [[육군]][[중장]] 최영두이고, 윤천계(고대), 김성희(서울대), 강상운(중앙대) 교수와 이종극, 김운태, 윤태림, 정범모, [[박종화]], 유호선, [[김정렴]], [[김학열]], 최규하, 이필석, 홍승면 등으로 구성되었다.<ref name="leejae"/> 이들은 [[1962년]] [[1월]] 이 연구실의 이름을 '동양화학 주식회사'로 위장하고 종로 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2~3층에 사무실을 차렸다.<ref name="leejae"/>
 
[[1962년]] [[아시아반공연맹]] 총회에 참석하여 민족반공연맹임시총회의장에 선출되었다. 반공연맹 총회에 다녀온 뒤 [[외무부]]장관 고문으로 복귀하고 [[1963년]] 외무부 본부 대사를 거쳐 그해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됐으며, [[1964년]] 주[[말레이시아]] [[한국]] 대사(1964년 11월 ~ 1967년 6월)를 지내고 귀국하여 [[1967년]] [[외무부]]장관에 발탁됐다.

==== 외무부 장관 시절 ====
그는 직접 외국을 다니며 외국을 상대로 북한측과 외교 논전을 벌였다. 당시에는 북한과의 외교전이 한창이라 외무장관들은 스스로 해외에 나가 유엔에서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담판을 짓는 일이 흔했다. 이때 최규하 외무장관은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외교 전쟁에서 맹활약을 하였다.<ref name="disos355"/>

67년 제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외무부장관으로 재임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행정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외교를 강화했다. 1968 제19차 콜롬보계획자문위원회 각료회의에 참석했으며, 이때 자문위원회 각료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9년]] [[6월 2일]] 미국의 패카드 국방차관을 만난 뒤 [[6월 3일]]과 [[6월 4일]]에는 연례 한미 국방각료회의에 참석하였다.<ref>김용직, 《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1945~1979》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408페이지</ref>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 국무총리 서리와 총리 재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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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6 사태 전후 =====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되었다. 그날 11시의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유고를 발표한다. 박정희가 살해당한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ref>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5) 305페이지</ref>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최규하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유신 헌법을 따라 [[대통령]]을 뽑은 뒤 개헌하겠다는 기만적인 '정치 발언 일정'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곧바로 민주화되기를 바라던 민중의 의지를 단숨에 꺾어 버리는 것이었다.<ref name="yok463">역사학연구소, 《바로 보는 우리 역사》 (서해문집, 2004) 463페이지</ref> 일의 변화를 지켜보던 민주 세력은 이 반동 음모에 맞서 새롭게 투쟁을 시작하였다.<ref name="yok463"/>
 
[[10월 27일]] 새벽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그는 [[박정희]] 피살사건의 조속한 수사를 명령하고, [[10월 28일]] 비상회의에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10월 27일]]자로 소급해임했다. 육군대장 [[정승화]]가 계엄사령부 사령관이 되었고, 육군소장 [[전두환]]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 [[11월 3일]] 암살된 [[박정희]]의 빈소에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명칭 변경)을 추서하고, [[국장 (장례)|국장]](國葬)을 결정, 박정희대통령국장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국장 (장례)|국장]]을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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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차지철로 보고받았다가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의 살해범이라고 보고받은 최규하는 [[10월 28일]], 전날 부로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장직을 면직하고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하여 수사를 지시한다.
 
===== 12.12학생 사태운동 세력의 시위 =====
[[1979년]] [[11월]] [[서울]] 학생 운동가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유신 헌법을 철폐하라는 시위가 터져나왔다. 최규하는 계엄령을 풀지 않고 미온적으로 대처하면서 지켜보았다. [[1979년]] [[11월 24일]] 각계 민주 세력들은 국민 대회를 열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ref name="yok463"/>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등 신군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내통했으니 체포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서 올라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받으려 하였다.<ref>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232페이지</ref> 그러나 최규하는 이들의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다'며 버텼다.<ref name="kim333">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233페이지</ref>
 
당시 상황을 10년 넘게 각계 각층 민중이 고난에 찬 반독재 투쟁을 벌인 결과로 보면서 참된 국민의 합의에 기초를 둔 민주 헌정을 서둘러 출범시키라고 요구하였다.<ref name="yok463"/> 독재를 연장하려는 유신 잔당들의 음모에 맞서 민주 인사들과 민중들은 "유신 철폐"와 "계엄 해제"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왔다.<ref name="yok463"/> 한편 그는 유신 잔당으로 몰리면서도 당분간 방침에는 변화가 없을 것임을 선언하였다. 이어 [[10.26 사건]]에 대한 수사에 전념하였다.
전두환은 노태우, 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했다.<ref name="kim333"/> 당시 [[청와대]]가 내부 수리 중이어서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살았다.<ref name="kim333"/>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갔다. 드러내놓고 위협했지만, 1시간 30분을 넘기도록 최규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ref name="kim333"/>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현을 잡아오라' 하였다. 상관을 체포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집행되었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마저 서슴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ref name="kim333"/>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행주대교]]를 건넌 1공수여단은 새벽 3시 50분께 지하 벙커에있던 노재헌 국방장관을 연행한다.<ref name="kim333"/>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 최규하는 드디어 재가한다.<ref name="kim333"/> 이로서 전두환은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ref name="kim333"/>
 
==== 1979년 대통령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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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2월 6일]] 통대에서 최규하가 대통령에 선출되어 다음 날 국무회의에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의결하였다.<ref name="aname160"/> 12월 10일 최규하는 총리직을 사직하고 신현확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다. 이후 12월 21일 취임식을 갖고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 12.12 사태 =====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 등 신군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내통했으니 체포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는 정식 결재 라인을 거쳐서 올라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연행을 재가받으려 하였다.<ref>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232페이지</ref> 그러나 최규하는 이들의 예상 밖으로 완강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다'며 버텼다.<ref name="kim333">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233페이지</ref>
 
전두환은 노태우, 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했다.<ref name="kim333"/> 당시 [[청와대]]가 내부 수리 중이어서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살았다.<ref name="kim333"/>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갔다. 드러내놓고 위협했지만, 1시간 30분을 넘기도록 최규하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ref name="kim333"/>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현을 잡아오라' 하였다. 상관을 체포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집행되었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마저 서슴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ref name="kim333"/>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행주대교]]를 건넌 1공수여단은 새벽 3시 50분께 지하 벙커에있던 노재헌 국방장관을 연행한다.<ref name="kim333"/>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 최규하는 드디어 재가한다.<ref name="kim333"/> 이로서 전두환은 군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ref name="kim333"/>
 
12.12 쿠데타의 주역들은 최규하와 [[신현확]] 등을 앞세워 유신 체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이원 집정제 개헌'을 내걸었다.<ref name="yok463"/>
 
=== 대통령 재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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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21일 취임식을 갖고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국론분열 방지와 정치안정을 강조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3022509451368900&outlink=1|제목 = 이승만·박정희·최규하…역대 대통령 취임사 살펴보니|저자 = 머니투데이|날짜 = 2013년 2월 25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28일}}</ref> [[12월 21일]] 최규하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이틀 후 [[긴급조치]] 관련자 561명이 특별사면되고, 1,330명이 석방되었다. 또한 제적학생 759명이 복학되고, 해직교수 19명이 복직되었다.<ref name="aname161">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161페이지</ref> 그러나 그는 유신 정권의 [[국무총리]]였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들에 의해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에 선출된 만큼, 그의 정권은 정당한 정권으로서의 권위를 누릴 수 없었다.<ref>김당택, 《우리 한국사》 (푸른역사, 2006) 493페이지</ref> 또한 최규하는 공직 생활 중에 독자적으로 자기 세력, 자기 파벌을 형성하지 못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최규하는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사실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 의해 퇴임할 때까지 허수아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ref name="mikuks"/>
 
[[1980년]] [[2월]]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의 복권을 선언한다.<ref name="aname161"/> 그는 [[이한빈]] 등을 발탁하여 경제부처를 운용케 했다. 1980년 상반기에는 국제 원유가 인상 등으로 소비자의 물가의 상승률이 30%에 달했다. [[1980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스 경식대훈장, 쿠웨이트 무바락알하비르 경식대훈장을 특별히 선물로 수여받았다.
 
그는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번째 사람이었다. 장기집권을 하던 [[박정희]]의 암살로 국민들은 유신헌법의 폐지를 통한 민주화를 원했다. 국가원로들과 전 대통령 [[윤보선]]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 체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민주적 절차에 의한 선거로 새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조치를 해제해 금지됐던 헌법 개정 논의를 허락했다.
 
한편 그는 경호수행 절차를 무시하거나 행사 시 곧잘 엉뚱한 행동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송국건,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28페이지</ref>
 
==== 실권 없는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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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12월 18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국정자문위원회]] 위원 오찬에 참석하다.
* [[1991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 저서 ==
* 《팔순기념문헌집》
 
== 상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