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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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조선]]의 왕족이라고 주장하는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ref>{{웹 인용 |url=http://www.hartford-hwp.com/archives/55a/186.html |제목= Who Was Rhee Syngman? |확인일자= 2007-12-01 |확인월일= |확인년도= |저자=Lee Wha Rang |성= |이름= |저자링크= |공저자= |작성일자=2000-02-22 |작성년도= |작성월= |형식= |작품명= |출판사= |쪽= |언어= |doi= |원본url= |원본일자= |인용= }}</ref> 초명은 승룡(承龍), [[아호|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경선은 이승만에 의하면 "그는 부자였었으나 재산을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고 한다.<ref name="hoigoi63">이승만,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63페이지</ref> 이경선은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했고 이승만 위로 두 아들을 두었다가 [[천연두]]로 잃자 세상을 크게 비관했다.<ref name="jong56">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56페이지</ref>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인용문2|내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우리 집안의 긴 핏줄은 끊어지게 된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딸이 둘 있고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 데다가 어머니는 자꾸 나이를 먹으시니 모두들 퍽 근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밤 어머니는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신의 가슴에 뛰어드는꿈을 꾸고 깨어나서 가족에게 그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갖게 될 태몽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여러번 되풀이하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ref name="hoigoi63"/>|이승만의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