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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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퇴직 [[대신]](大臣)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 (양녕대군 봉사손)|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 /> 도동서당은 [[한성부]] 용산에 있었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아버지 이경선은 풍수지리에 몰두하여 조상의 묘자리를 새로 찾아 이장함으로써 가문의 재흥을 꾀한다는 생각에 남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방랑으로 집에서 일없이 지냈다.<ref name="jong56"/> 어려서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아들 이봉수가 요절하면서 관계는 소원해졌고 결국 해방 후 최종 이혼한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ref name="이정식"/>{{Rp|244}}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ref name="이정식"/>{{Rp|244}} 한편 이승만은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에 의하면 자신이 태어날 당시 사람들은 상당히 미개하고 문을 꽉 닫고 살았다고 했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중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을 무슨 뿔달린 괴상한 짐승들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기억한다.<ref>이승만,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66페이지</ref>'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