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주연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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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은 [[1947년]] [[12월 20일]] [[김규식 (1881년)|김규식]] 등에 의해서 창당, 발족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당의 강령은 독점자본주의도 아닌 무산계급독재사회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분단을 막기 위한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좌우합작운동]]의 실패 후, [[좌우합작]]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1947년]] [[12월]]에 결성되었으며, 당수로는 [[김규식 (1881년)|김규식]]을 선출하였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당수였던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남북협상]] 참여 이후 [[1948년]] [[5.10 총선거|5.10 단독 총선거]]에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에게는 참가해도참가를 좋다고 선언하였다권고했다. 또, [[1950년]] [[5월 10일]]의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도 당수 김규식 자신은 불반대참여하지는 불참가 성명을 발표하였으나,않았지만 당원들의 출마는 허락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의 와중에 소멸되었다.
 
== 개요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의 와중에 소멸되었다.{{출처}}
[[1947년]] [[10월 1일]] 창립발기회<ref name="seos590">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590페이지</ref>를 개최하고 공식 출범하였다.
 
[[1947년]] [[12월 15일]]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산되었다. 이후 12월 20일 서울특별자유시 천도교당에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이 있었다. 15개 정당과 사회단체 25개가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은 "금일의 조선에는 독점자본주의사회도 무산계급사회도 건립될 수 없고, 오직 조선의 현실이 지시하는 조선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건립만이 가능"하다고 선언하였다.<ref name="seos593">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593페이지</ref> 이어 남북통일 중앙정부의 조속 수립을 위하여 남북정치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할 것을 주장하였다.<ref name="seos593"/>
 
민족자주연맹의 총재에는 [[김규식]], 정치위원에는 [[홍명희]], [[원세훈]], [[이극로]], [[손두환]], [[윤기섭]], [[김성규]], [[김순애]]가 선임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의 결성식에는 하지 [[미국 육군]] [[중장]], [[윌리언 딘]] 군정장관, 브라운 미육군 소장, 헬믹 미육군소장, [[장건상]], [[조병옥]], [[장택상]] 등이 축사를 하였는데, 장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군정]]의 핵심인물들이었다.<ref name="seos593"/> 또한 [[남조선노동당]]의 당수 [[박헌영]], [[민족주의독립전선]] 측의 [[조봉암]]도 사람을 보내 개회사 직전에 참여하여 내빈축사를 낭독하고 돌아갔다.
 
[[미군정]] 수뇌들은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함으로써, 이 당시 [[이승만]]에게 보낸 반응과 대조적으로 [[김규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지만, 그러나 미군정측이 남북지도자회의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개인 [[김규식]]에 대해서 보인 호의와는 무관하게, 민자련은 미군정, 미국과 대립되지 않을 수 없었다.<ref name="seos593"/>
 
김규식을 정점으로 한 민족자주연맹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미소 양군의 철퇴를 지지하여 미국측 입장과는 차이를 보였다. 또한 민족자주연맹은 자주국가 건설 방안으로 남북요인회의를 열 것을 주장하였다.<ref name="seos590">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2) 590페이지</ref> 민자연은 창립 발기회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가졌으며, 결성식 때에도 미군정 고위 인사들이 참여하였다.<ref name="seos590"/>
 
당수였던 [[김규식 (1881년)|김규식]]은 [[남북협상]] 참여 이후 [[1948년]] [[5.10 총선거|5.10 단독 총선거]]에 불참하였으나 당원들에게는 참가해도 좋다고 선언하였다. [[1950년]] [[5월 10일]]의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도 당수 김규식 자신은 불반대 불참가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당원들의 출마는 허락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의 와중에 소멸되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