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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uyang Xiu.jpg|thumb|280px|구양수]]
'''구양 수구양수'''(歐陽 脩, [[1007년]] ~ [[1072년]])는 [[중국]] [[송나라]] [[북송 인종|인종]] ~ [[북송 신종|신종]] 때의 정치가이자 문인, 학자이다. 자는 영숙, 취옹. 육일거사. 익호는 문충문충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 생애 ==
길주 여릉(현재의 [[장시 성]] 길안[[지안 시 (장시 성)|지안]])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4살 때 부친을[[쓰촨 여윈다.성]] 지방관이었던 부친인부친 구양관(歐陽觀) 쓰촨 성 지방관이었는데, 그의여의었다. 사후이후 어머니를 따라 백부 구양엽(歐陽曄)이 추관(推官)으로 있는 수주(隨州), [[후베이(湖北) 성|후베이]])로 가서 생활하며 빈궁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정규교육에 의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구양수는 [[한유(韓愈)]]의 깊고 예리한 문장에 매력을 느꼈고 그를 추앙했다. 1023년 17세 때 처음으로 수주의 지방 고시에 참가하지만 그의 용운(用韻)이 관운(官韻)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패한다실패했다. 그 뒤 1028년 명사인 서언(胥偃)을 찾아가 자신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서언은 구양수의 웅대한 문장에 감탄해 그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이게 된다받아들였다. 그해 겨울 서언과 함께 경사로 가서 춘계국자감고시(春季國子監考試)에 응시한 구양수는 수석의 영광을 얻었고, 가을에는 국학(國學)에 응시해 또 수석을 차지하게 된다.
 
1030년(천성 8년) 서른 살때 진사에게진사에 급제하여 고관으로 출세의 길이 열려있었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가꾸진 독립 사상은 그의 성품 중의 하나로 계속해서 남게 되었다. 이후 관각 비교 연구 등을 역임하지만, 1036년 (경우 3년) 개혁파 [[범중엄]]을 월권을 하면서까지 변호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당시 재상이었던 여의간에[[여이간]]에 의해 이능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1034년에는 아내와 자식이 죽는 아픔을 겪었으나 1043년 [[북송 인종(仁宗)|인종]]은 언로(言路)를 확장하기 위해 간관(諫官)을 늘리면서 구양수 등을 지간원(知諫院)으로 삼고 여정(余靖)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임명하자 같은 해 4월에 구양수는 경사로 돌아온다.
 
약 십년의 지방 근무 후, 중앙에 복귀 간관에 임명된다. [[범중엄]] 등과 경력의 개혁을 진행하다가 인종의 신임를 잃게 되고되었고, 1045년 (경력 5년)에는 비방을 받아 [[안후이 성]]의 지사로 또 한번 좌천되었다.
 
후에 다시 한번 중앙에 복귀하여 한림학사 등 요직을 역임한다역임했다. 1054년 수년몇 년 만에 구양수를 만난 인종은 그의 노쇠한 외모와 상황을 측은히 여겨 극진히 대우하며 이부(吏部)의 유내전(流內銓)에 임명한다임명했다. 1057년 (가후 2년) 권 지례 부공거에 오르고, 1058년에는 [[포증]]에 이어 개봉 부윤의 임무에 종사한다. 또한 과거 시험을 감독하여 [[소식]]을 발굴해 낸다발굴했다. 당시 구양수의 정적들은 그의 기용에 두려움을 느끼고 각종 모함과 구설수를 만들었지만, 구양수는 지속적으로 경사에 머무르며 <《[[신당서|당서(唐書)>]]》 편찬에 참여하게 되고 한림학사 겸 사관수찬(翰林學士兼史館修撰)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 후 추밀부사, 삼지정사(부재상)에 오르고, [[소순]], [[왕안석]] 등을 등용했다. [[왕안석의 신법]]을 전부터 지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신법이 실시되자 역으로 [[청묘법]]에 대해 엄격한 논고를 지켜보는 등 가장 강력한 반대파의 한 사람이 되어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다음해인 1072년 (희녕 5년), 은둔 생활을 하며 영주([[안후이 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양수는 66세의 나이로 천명을 다했고, 2년 후에 조정에서 ‘문충'문충(文忠)’이라는'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충’은문충은 그가 일생 동안 이루어낸 문학적 위업의 저력을 알 수 있는 상징이다.
 
== 후대 문화에 끼친 영향 ==
=== 문학 ===
==== 산문 ====
산문에 있어서는 [[한유]]의 예를 모방하고, 이른바 고문 부흥운동을 추진했다. 저주(滁州)의 자연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취옹정기는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 [[사 (문학)|사]] ====
운문으로는 시(詩)와 사(詞)를 모두 쓰고, 은밀하고 유머러스한 작풍이다. 시는 당나라 후기의 현란한 문체를 피하고, 당나라 전성기의 실질적이고 강건한 위풍을 따랐다. 구양수는 사(詞)로도 유명한데, 특히 채상자(采桑子)를 위해 만들어진 서호호(西湖好)라고 지어진 일련의 사는 그 양식의 표준이 되어 사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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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작가로서의 구양수를 유학(儒學)과 밀접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와 관련한 대부분을 ‘개인적인 것보다는 사회적인 것’에, ‘해이한 것보다는 경직되고 긴장된 것’에, ‘유흥적인 것보다는 건설적인 것’에 무게를 둔다. 틀린 것은 아니다. 구양수의 시문을 통해 그를 이해한다면 맞는 말이다. 별다른 배경 없이 상식만을 가지고 구양수를 본다면, 구양수는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한 사람을 제삼의 눈으로 보아낸다는 것은 대단히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지금은 아쉬울 것이 없어도 앞으로는 아쉬울 것이 있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특히 심리의 저변은 본인만이 알기 때문에 옆에서 단정 지어 무어라 말할 계제도 아니다.
 
그런데 구양수는 사를 통해서 아쉬운 소리와 사람들이 보지 못한 많은 심정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구양수가 사를 통해 사람들이 보아내지 못하는 이면의 감정을 상당 부분 노출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배경 때문이었다. 사는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가장 유리한 수단이었고, 점차 흥행해 구양수가 살던 시기에는 지체의 고하에 관계없이 모두가 애용하는 국민 문학의 형식이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구양수가 [[공자(孔子)]][[맹자(孟子)]]를 계승하고 한유(韓愈)의한유의 도통(道統)을 이은 사람이라고 해도 기녀와의 사랑에서 느끼는 세심한 희열과 비애를 사 형식을 빌려 거침없이 쓰는 것이 결격이나 비난의 사유가 되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민망한 내용이나 표현도 적잖게 보이지만 오히려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이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구양수 문학 세계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을 망라해 보아야만 하고, 사는 구양수의 문학에 대한 오해를 일소하고 환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관건이 된다.
 
 
=== 역사 ===
역사가로서 구양수는 지방 근무 중에 [[신오대사(新五代史)]]를 편찬하고, 중앙에 복귀하여 송기 등과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명한 경학자였던 류창(劉敞)과 작업을 같이 하여 범례를 찾게 만들어진 것으로, 춘추 학문적 색채가 강한 근엄한 스타일을 견지한 책으로서 평가됐다. 또 금석문의 수집을 좋아하여, 집고록(集古録)을 정리, 사료 편찬의 방법으로서 금석문의 활용을 확립하는 송대의 역사수법(특히 [[금석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저서 ==
구양수의 일련의 작품은 주필대(周必大)에 의해 구양문충공전집(欧陽文忠公全集)으로 정리되었다.
 
* 구양수 사선, 홍병혜 역, 2009년, [http://zmanz.blogi.kr/734 지식을만드는지식] ISBN 978-89-6406-3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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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중국의송나라의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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