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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의병 봉기의 수는 약 5만 명, 충돌 건수는 304회, 1908년에는 약 7만 명 그리고 1450여건, 1909년 약 2만 8천여명의 의병과 950여건의 충돌 그리고 1910년에는 약 1900여명과 147건의 충돌 건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 피해 내용을 보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의병이 사망 16,700여명, 부상 36,770여명이고 일본군 사망 130여명, 부상 270여명 그리고 한국인 사망 1,250여명, 일본인 120여명으로 68,800여戶의 가옥의 소실로 통계되어...『日韓合邦秘史』上, pp.366-367<ref>조선통감부연구 2, 국학자료원, 강창석, 54~55쪽, ISBN 895410200X </ref>}}
 
당시 의병 투쟁이 가장 활발한 지역은 전남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의 일본인 지주가 의병 활동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1909년 목포 일본인 상업회의소의 강력한 요구로 일제는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국내 의병들과 결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의병 활동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입어 근거지를 만주 등지로 옮기게 되었고,<ref> 한국사특강, 243쪽. </ref> 이들은 [[독립군 (조선)|독립군]]의 주축으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의 유명한 의병 활동가로는 [[홍범도]], [[김상한]], [[신돌석]], [[안중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