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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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크]],<ref name="Plutarch">Plutarch, ''Life of Caesar'',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Plutarch/Lives/Caesar*.html#49 49.6].</ref> [[겔리우스]],<ref>Aulus Gellius. Attic Nights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Gellius/7*.html book 7 chapter 17].</ref> [[암미아누스]], [[마리켈리누스]], [[오로시우스]] 등의 역사가들은 모두 [[기원전 48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실수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고 기록하였다.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기록된 플루타르크의 <Parallel Lives영웅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cquote|카이사르는 자신의 배에 불을 붙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적들이 그의 바다를 통한 통신 능력을 막으려하자 자신의 배를 태워버렸다. 이 불길은 부두를 태우고 나서 번지고 번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까지 불태우기에 이르렀다.<ref name="Plutarch"/>}}
 
[[윌리엄 쉘프]]는셔프는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13세와의 전투에서 처음에 불바람이 일어났고, 부두를 불태운 후에 도서관에 불이 옮아 붙어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2세기 무렵엔 로마의 역사가 [[겔리우스]]는 그의 저서 <Attic Nights> (Latin: Noctes Atticae)에서 카이사르의 군사가 부두에 불을 놓는 과정에서 실수로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전했다. 또 4세기 무렵엔 비기독교도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와 기독교도 역사가 [[오로시우스]]는 도서관이 카이사르의 방화에 의해서 불태워졌다고 기록했다. <알렉산드리아 전쟁>의 익명의 저자는 이집트 해군을 공격하려 놓았던 불이 파피루스로 가득 찬 “상점”을 불태웠다고 기록했다.<ref>Caesar, ''de bello alexandrino (the Alexandrian Wars)''.</ref> 하지만 브루키온 주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위치에 대한 지리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상점” 혹은 불태워졌다는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Bibliotheca Alexandrina)이 될 수 없다.<ref>Jean-Yves Empereur, Alexandria: Jewel of Egypt, p. 43.</ref>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이 역사가들이 “책더미”를 뜻하는 “bibliothekas”와 “도서관”을 뜻하는 “bibliotheka”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부두 주변의 책들이 불태워졌다는 기록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와 연결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들이 도서관 책과는 별개인 다른 책들이 불탄 것이든 도서관의 책들이 실제로 불탄 것이든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c. 4 BC – AD 65)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40,000여개의 책들이 모두 불탔다고 기록하고 있다.<ref>Seneca, ''De Tranquillitate Animi (On Tranquility of Mind)''.</ref>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안토니우스]]는 로마 제국 동쪽을 점령하고 나서 (40–30 BC) [[페르가몬]]에 위치한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도서관을 약탈했다. 그리고는 카이사르의 방화에 의해 불태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들을 대체하기 위해 약탈한 책들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했다. Abaddi는 이 이야기를 반-아우렐리우스안토니우스 선전에 이용했다.
 
[[테오도르 브리토스]]는 방화에 의한 피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