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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
[[초 의제]]의 주국(柱國)을 지냈다.<ref name="s7"/>
[[초 의제]]의 주국(柱國)을 지냈다. [[기원전 206년]], [[항우]]가 함양에 들어가 제후왕들을 책봉하면서, 남군 평정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공을 많이 세웠으므로 진나라의 옛 남군 땅을 받아 임강왕이 되었고, 서울은 강릉(현재의 [[후베이 성]] [[장링 시]])에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항우는 의제를 장사군의 침현으로 보내고 은밀히 공오와 형산왕 오예, 구강왕 [[영포]]에게 명령을 내려 초 의제를 제거하게 하니, 강중에서 공격하여 죽였다.<ref name="s7">[[사마천]]: 《[[사기 (역사서)|사기]]》 권7 항우본기제7{{위키문헌|:zh:史記/卷007|사기 권7 항우본기}}</ref>
 
남군 평정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공을 많이 세웠다는 《사기》의 기록에 비추어 보아, [[초 의제]]에게서 각각 명령을 받아 [[진나라]] 본토로 들어간 [[항우]], [[전한 고제|유방]]와는 다른 경로로 진나라 본토로 들어가려 한 것으로 보인다.<ref name="h18bsk">
{{저널 인용
| 저자 = 李容一
| 연도 = 1999
| 월 = 10
| 제목 = 項羽의 18諸侯王 分封의 性格에 관하여
| 저널 = 中國史硏究
| 권 = 7
| 쪽 = 1 ~ 41
}}
[[초 의제]]의 주국(柱國)을 지냈다.</ref> [[기원전 206년]], [[항우]]가 함양에 들어가 제후왕들을 책봉하면서, 남군 평정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공을 많이공적을 세웠으므로통해 진나라의 옛 남군 땅을 받아 임강왕이 되었고, 서울은 강릉(현재의 [[후베이 성]] [[장링 ]])에 두었다. 항우의 정치적인 의도는 공오와 의제를 떨어트리고자 하는 것이었다.<ref name="h18bsk"/> 얼마 지나지 않아, 항우는 의제를 장사군의 침현으로 보내고 은밀히 공오와 형산왕 오예, 구강왕 [[영포]]에게 명령을 내려 초 의제를 제거하게 하니, 강중에서 공격하여 죽였다.<ref name="s7">[[사마천]]: 《[[사기 (역사서)|사기]]》 권7 항우본기제7{{위키문헌|:zh:史記/卷007|사기 권7 항우본기}}</ref>
 
[[기원전 204년]], 공오가 죽고 아들 공위가 뒤를 이어 임강왕이 되었다.<ref name="h13">[[반고]]: 《[[한서]]》 권13 이성제후연표{{위키문헌|:zh:漢書/卷013|한서 권13 이성제후연표}}</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