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59.11.30.98(토론)의 편집을 24.4.216.138의 버전으로 되돌림
9번째 줄:
[[1910년]] 마침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이 계획을 구체화하여 [[1911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윤기섭]] 등과 함께 간도 지방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데 참가했다. 경학사는 자치 조직,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그는 군정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1919년]]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로 조직을 개편하고 참모장을 맡았다. [[3·1 운동]]의 단초 중 하나를 제공한 [[무오 독립 선언]]에 [[무오 독립 선언 민족대표 39인|39인 대표]]로 [[지린]]에서 참가하기도 했다. [[1922년]]에 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에 가담했고,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 및 의장으로 참가하였으며 [[1925년]] [[정의부]] 참모장에 취임했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의 시신은 [[한용운]]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ref>만해기념관, [http://www.manhae.or.kr/library2-7.htm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 - 7.심우장의 정절]</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