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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까지도 인육을 약으로 믿어 자양강장, 회춘의 효과가 있다고 믿고 복용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중국에서 밀수된 인육을 동봉한 캡슐이 뒷거래로 나도는 것이 [[2011년]] 8월 한국의 세관 당국에 의해 발표되어 국내외의 큰 문제가 되었다. 한국의 세관과 경찰, 보건 당국이 단속에 나섰음에도 이미 대량으로 나돌게 된 인육 캡슐은 적발이 쉽지 않았고, 1정에 3만 원 정도로 거래되고 있었다. 북한의 경우 농업정책의 실패로 식량부족이 만성화되고 있는데, [[2012년]] 봄에만 수만 명 규모의 아사자가 발생했으며 그 원인은 북한 정부와 군부(조선인민군)에 의한 식량 강탈에 있었다. 굶주려 정신이상을 일으킨 부모가 자식을 솥에 넣어 삶아 먹고 잡혀 죽은 사건이나 인육의 밀매, 유통 등의 사건이 북한에서는 끊이지 않고 있다.
 
==== 일본 ====
일본에서 식인은 전설상의 [[스이제이 천황]](綏靖天皇)이 일곱 명을 먹었다는 《신도집(神道集)》의 고사를 비롯해 슈텐도지(酒呑童子) 설화의 [[미나모토노 요리미쓰]](源頼光) 일행, 아다치가하라(安達原)의 오니바바(鬼婆)의 집에 들은 나그네 이야기 등 여러 설화에서 식인이 목격되고 있다.
《도노 모노가타리 습유(遠野物語拾遺)》제296화와 제299화에서는 도노마치(遠野町)에서 5월 5일에 스스키모치(薄餅)라는 떡을, 7월 7일에 훗타 소면(筋太の素麺)을 먹는 풍습의 유래에 대해서 죽은 애처의 살과 힘줄을 먹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나 한국의 식인에서 보이는 '할고'의 풍속은 일본에서도 《명량강범(明良綱範)》 등에서 보이고 있는 이야기다.
 
[[센고쿠 시대]]의 자료인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돗토리 성(鳥取城)을 병량공격할 때 성안의 병사들이 풀뿌리며 우마를 잡아먹다 못해 성을 탈출하려다 오다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을 먹으려 다투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에도 시대의 수필 《신저문집(新著聞集)》에는 [[겐로쿠]](元禄) 연간에 증상사(増上寺)의 승려가 장례식에서 죽은 자의 머리를 깎이다가 실수로 두피를 약간 긁어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것을 감추느라고 자신의 입에 넣었는데, 그것을 몹시 맛있다고 생각하고는 자주 묘지로 나가 무덤을 파고 시체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으며, [[보신 전쟁]](戊辰戦争) 때에는 막부측의 총지휘관이었던 마쓰다이라 마사타다(松平正質)가 적병의 볼살을 구워 술안주로 먹었다거나, [[사쓰마 번]](薩摩藩)의 병사들이 시체에서 간을 꺼내 삶아 먹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가장 확실한 기록은 에도 시대의 4대 대기근 때에 인육을 먹었다고 하는 것이다. [[덴메이 대기근]] 때인 [[덴메이]](天明) 4년([[1784년]]) 히로사키(弘前)에서 식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다치바나 난케이(橘南渓)가 《동유기(東遊記)》에 적고 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