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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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의 가계는 불확실한데 고이왕은 보통 《[[삼국사기]]》의 기록을 취해 [[개루왕]]의 아들로 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 및 《[[삼국유사]]》에는 [[초고왕]]의 모제(외삼촌)이라 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초고왕]] 사후 20년 뒤에 즉위하여 그때로부터 다시 50년을 재위하였으므로 [[초고왕]]의 동생인가 여부에 이견이 존재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백제 초고왕|초고왕]]의 동생,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초고왕|초고왕]]의 동모제(외삼촌)으로 [[백제 구수왕|구수왕]]이 죽은 뒤 친척이자 [[구수왕]]의 장자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온조왕]]의 형 [[비류]]의 후손이라는 설과, [[초고왕]]의 차남의 아들 혹은 손자라는 설이 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괴곡(槐谷: [[충청북도]] 괴산군)·[[봉산]](烽山: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다. 내정면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 제도와 복식 제도를 제정했으며, 그것은 고이왕이 죽은 뒤에도 지속되어 그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4백 년간이나 이어져 백제의 기본 제도로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