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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나라 ====
[[중국고조선]]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221) 연(燕)나라 때 매우 약해져 연나라에 속한 ‘진번’과 ‘조선’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연나라는 중국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때의 연은 진시황의 진(秦)과 다투다 패배한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연이다연(燕)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은 진시황이 죽자 곧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다 유방이 승리해 한(漢, 서기전 206~서기 220)나라가 등장했다.
 
BC 3세기경 사마천의[[사마천]]의 사기에는[[사기]]에는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를 1000리 밖으로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史記 卷110 匈奴列傳)
 
또한 한대의 정책 서적인 염철론(鹽鐵論)에선 이 사건이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1000리를 물러나게 했으며, 요동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라고 기록했다.(鹽鐵論 卷 8 伐攻篇)
 
같은 사건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고조선과 연나라의 갈등이 극심하여 결국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이 매우 약화됐다고 했다. 즉, [[고조선]]은 동호였다는 기록이다.(三國志 卷30 魏書).
 
[[고조선동호]]은 동호였다는 기록이다. 동호라는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BC 5~3세기에 요령성 서쪽 지역의 각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분석하고 동호와[[동호]]와 한민족을[[한민족]]을 일컫는 [[동이]](東夷)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연나라왕 노관의 부장이었던 위만이 혼란을 틈타 연나라인 상당수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해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울 때까지 요동땅은 [[고조선]]과 [[부여]], [[예맥]]의 관할이었다.(魏略)
 
위만조선을이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이후 한나라의[[한나라]]의 여러 왕이 흉노를 토벌했을 때, 흉노족이 힘을 잃은 내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게 선비족이다.선비족, 선비족에서는 모용부와 우문부 탁발부 등 여섯 부족이 강력했는데, 부족 이름을 성(姓)으로 사용했다.
 
먼저 크게 일어난 것은 모용외, 모용황 부자(父子) 때의 모용 선비족이다. 아버지 모용외가 세력을 키우자 아들 모용황은 황제에 올라 다른 연(燕)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노관이 이끌었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전연(前燕)’으로 표기, 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호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 모용황은 아버지가 [[고구려]]에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