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스테파노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2번째 줄:
[[데키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말기에 히스파니아의 메리다의 미르시알과 아스토르가의 바실리데스 [[주교]]가 이교의 [[신]]에게 제물을 봉헌하고 증명서를 받았다고 하여 주교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바실리데스가 개인적으로 스테파노 1세를 찾아가 자신과 마르시알의 복직을 얻어냈다. 이 소식을 접한 치프리아노와 [[아프리카]]의 주교들은 회의를 열어 히스피니아의 교회들에 편지를 보내어 두 주교를 복직시키지 말도록 권유하였다. 그 후 리옹의 주교 파우스티누스는 치프리아노에게 2통의 편지를 보내어 이단자 노바시아노와 연결되어 있던 아를의 마르치아노를 단죄하자 치프리아노는 그 사건에 개입할 마음이 없어 스테파노 1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마르치아노를 교회의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스테파노 1세와 [[치프리아노]] 사이에 [[이교]](離敎)에서 집전한 [[세례]]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스테파노 1세는 이교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보편 교회로 회심한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치프리아노와 아프리카 및 소아시아의 다른 로마 속주의 주교들은 이교의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회심한 이들이 보편 교회의 성찬례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55년 평신도 마그누스의 요청에 따라 치프리아노가 교회 밖에 있는 이단자들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논증하자 255년 카르타고 교회회의는 이를 지지하였다. 이에 치프리아노는 256년 71명의 주교가 참석한 회의의 결과를 로마에 보냈다. 그러나 치프리아노의 사절단이 홀대받자 로마 교회와 카르타고 교회는 대립하게 되었다. 치프리아노는 스테파노 1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각 주교는 자기 교구에서 주인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스테파노 1세도 강경하게 맞섰다. 그러자 치프리아노는 256년 9월 1일에 소집된 주교 87명의 지지를 얻어 카파도키아 지역 카에사리아의 주교 피르밀리아노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황을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하였다. 피르밀리아노가 보낸 편지는 스테파노 1세를 심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이교에서 거행한 세례를 인정한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스테파노 1세가 이들을 파문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 주교가 스테파노 1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양자를 조절하였다. 결국 스테파노 1세의 주장이 승리하여 교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이교에서 회심한 이들은 안수로써 죄 사함을 받고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ref name="ce"/>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