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평부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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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박씨는 [[1466년]] [[8월 19일]] 월산군[[월산대군]](月山君) 이정(李婷)과 혼인했다.<ref name="세조12">《세조실록》 12년(1466) 8월 19일 3번째 기사</ref> 당시 박씨의 아버지 박중선은 병조 참판으로, [[조선 세조|세조]]의 이종사촌이었다.<ref>세조의 어머니인 [[소헌왕후]]와 박씨의 할머니(박중선의 어머니)는 [[심온]]의 딸로 자매간이었다</ref> 박씨와 월산군의 혼인은 세조의 조카 [[영순군]]의 집에서 치러졌고, 세조와 정희왕후는 궁궐 안에 다락을 만들어 큰손자의 혼인을 멀리서 구경했다.<ref name="세조12"/> 월산군과의 혼인으로 상원군부인(祥原郡夫人) 박씨(朴氏)에 봉해졌다가, 후에 시동생 자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승평부부인으로 승격되었다. 월산대군과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고, 월산대군은 후실 사이에서만 두 아들을 두었다.
 
박씨는 미모가 출중한 여인으로 그녀를 둘러싼 추문도 많았다.<ref name="kmj">김만중, 《숨겨진 조선의 연애 비화 48가지》올댓북, 2008, p.134, ISBN 9788990790828</ref> 연산군은 어릴 때 잔병치레가 잦아 백부인 월산군의 집 덕수궁에 자주 피접을 나갔고, 그를 손수 길러준 박씨는 연산군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ref name="kmj"/> 후에 연산군은 보위에 오르자 자신의 [[이황 (폐세자)|세자]]도 박씨에게 기르게 하고 세자가 커서 궁으로 돌아올 때 박씨도 같이 들어오게 했다.<ref name="kmj"/> 연산군은 박씨에게 많은 물품을 하사하고 [[인수대비]]에게 효도를 했다는 이유로 정려문도 지어 주었다.<ref name="lee">이덕일, 《조선 선비 살해사건2》 다산초당, 2006, p.194~195, ISBN 8991147682</ref> 그는 박씨에게 처소를 내어주고 자주 처소를 방문해 간통을 했으며<ref name="kmj"/> 승평부부인의 당호 앞에 '大' 자를 넣어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게 하였다.<ref name="lee"/> 이후 연산군은 박씨와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 월산대군의 묘에 긴 창을 꽂게 했다.<ref name="kmj"/> 이처럼 박씨가 시조카인 연산군에 의해 겁탈당하였다는 소문은 당시에 파다했다. 그 뒤 박씨는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연산군의 아이를 잉태하여 자결했다고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사에선 연산군에게 성병을 옮아 자결하였다고도 한다.<ref>육광남, 《연산군일기》, 하늘과 땅, 2006, p.491, ISBN 8995500689</ref> 그러나 이에 대해선 당시 박씨는 쉰을 넘긴 나이였으므로 아이를 가져 자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ref name="kmj"/><ref>이어령, 이덕일, 전봉관, 허동현, 정옥자, 송호근, 《인문학 콘서트3》 이숲, 2011, p.170, ISBN 9788994228143</ref> 중종반정의 주모자였던 [[박원종]]이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이와 연산군 간의 사건을 조작하여 소문을 퍼뜨렸다거나, 불심이 깊었던 박씨가 당시 유교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ref name="k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