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도시나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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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이에 사후 ===
아버지 도시이에는 도요토미 정권에서 [[고다이로]](五大老)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다. 게이쵸 4년 ([[1599년]]) 도시이에가 병사하자 도시나가는 아버지 도시이에를 이어 고다이로가 되었다. 그 다음날인 [[고부교]](五奉行)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습격당하는 일이 터지자 마에다씨는 대 도쿠가와 급 선봉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이에의 유언에는 3년동안 [[가나자와]](金沢)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유로 가나자와로 귀국 하였다. 다음 달, [[마스다 나가모리]](増田長盛)는 도시나가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등이 딴마음을 품고 있다고 이에야스 한테 밀고 하였다. 이 시기 마에다씨를 굴복하여던 이에야스의 모략이었다고 여겨지며 이에야스는 가가정벌을 시행하였다.이 시기 마에다 가문은 교전파와 회피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교전파는 호소가와씨(細川氏), 우키다씨(宇喜多氏)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도요토미 가문이 거절하여 중신 요코하마 나가치카를 사신으로 보내어 친어머니 마쓰를 인질로서 에도의 이에야스에게 보내주는 것, 양세자양자 도시쓰네(利常)와 다마히메(珠姫,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의 딸)를 혼인시키는 것, 자신의 은거를 약조해 교전을 피하였다.
 
=== 세키가하라 전투 ~ 가가번 성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