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4번째 줄:
 
== 생애 ==
[[772년]], [[뤄양]](洛陽) 부근의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県, 지금의 하남 성河南省 신정 시新鄭市)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 6세때 이미 시를 짓고, 9세 때에 호율(號律)을 깨달았다고 한다.
[[뤄양]] 부근의 신정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서기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한림원의 학사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807~815년까지 항명에 의해 유배를 갔다. 다시 [[항저우]]의 지사로 재시작하여 822년부터 824년까지 [[항저우]]를 다스렸으며, 825-827까지 [[수저우]]를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으로서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虎)에 건설한 백제는 아직까지 남아서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学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虎)에 건설한 백제는 아직까지 남아서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838년]]에는 태자소전(太子少傅)이 되었으며, [[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백씨장경집)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