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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군수]]로 재직할 때 [[대구읍성]]을 허물고 도로를 만들어 지식인들의 원성을 사는가 하면 동시에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하도록 협조했다. 이때 [[내무부]]의 허가를 받지않고 일을 처리하여 징계를 받을 상황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으로 오히려 영전<ref>역사학자 공저,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푸른역사, 2005) 358페이지</ref>했다. 박중양은 조정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를 동원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냈던 것이다.<ref name="khandosi">[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1011746051&code=210000 <nowiki>[</nowiki>한국 도시디자인 탐사<nowiki>]</nowiki>(9)대구읍성 해체와 식민도시화] 경향신문 2007.11.01</ref>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속에 가능했다.<ref name="khandosi"/>
 
통감정치를 하고 있을 무렵, 그는 '[[대구읍성|대구성]]을 헐어도 되는가'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불가(不可)의 명령이 내려왔다.<ref name="daegumulo0362">월간문학사, 《월간문학 35권 제3호》 (월간문학사, 2003) 362페이지</ref> 그러나 박중양은 읍성 해체를 강행한다. [[1906년]] 당시 그는 조정의 승인도 없이 일본 거류민단의 주장을 받아들여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ref name="kiesdaek">[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80101012130073002 <nowiki>[</nowiki>문화<nowiki>]</nowiki> (6) 대구 ① 자본,권력에 ‘옛 성곽의 도시’무너진다] 문화일보 2003년 08월 01일자</ref> [[일본인]]들은 [[대구역]] 근처에 매입해둔 도원동 일대 수만평의 땅을 개발하기 위해 대구읍성의 철거를 요구했던 것이다.<ref name="kiesdaek"/> [[1906년]]철거를 [[3월]]부터시작한지 [[대구읍성]]을10일이 철거하였는데,경과한 [[10월 1일]]에 철거해도 되느냐는 장계를 보냈다.
 
{{인용문2|[[대구부]]의 성이 오래되어 토석(土石)이 곳곳에 붕괴되어, 다니는데 방해만 되고 심히 위험하온데, 곧 성첩을 철거할진대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어 자연스레 [[대구]]의 주요 시설물로 만들고자 하오니 대구부청이 이를 주관케 해 주시고 이 사업을 실행케 하고자 조정에 보고하오니 소상히 판단하셔서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립니다<br /><br />-[[1906년]] [[10월 1일]] [[경상북도]][[관찰사|관찰사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ref>1906년 10월 1일 조정에 장계로 보낸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ref>}}
 
당시 대구군수였던 박중양은‘혁구개신(革舊改新·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이라는 명분 아래 [[대구읍성]] 해체를 시작했다.<ref>[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90745 황제의 길은 항일 투쟁의 길이었다] 데일리안 2010.02.06</ref> 박중양은 일본인 이와세, 니타에, 사이토, 이토 네 사람과 극비리에 모의하고 한·일 인부 60명을 부산에서 고용하여 읍성 해체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