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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7월 [[천두슈]]는 [[코민테른]]에 의해 중국 공산당 총서기 직을 잃었는데, 그뒤 [[장궈타오]]가 잠시 천의 대리로 있다가 이 해 8월부터는 취추바이가 천을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중앙위 총서기]]가 되었다. 그는 당총서기에 오른 뒤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중국 도시들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 조직해 도시를 점령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강조했다. 1927년 8월부터 1928년 5월까지 임기에 그는 중국에서 세 차례의 폭동을 기획하였는데, 1927년 11월 11일 [[무한]](武漢) 폭동, 12월 10일 [[창사]](長沙) 폭동, 12월 11일 [[광저우]](廣州) 폭동이었다. 그러나 공산당 요원들이 일으킨 무장 폭동들은 모두 정부의 반격으로 분쇄됐고 그의 이러한 봉기 정책들은 난관에 부딛쳤다. 그는 곧 소련으로 불려가 혁명에 대한 재지도를 받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그러나 [[1928년]] 이후 다시 코민테른에 의해 ‘좌익 기회주의자’로 몰리면서 총서기 직에서 파면, [[샹중파]]가 총서기에 올랐다. [[1931년]]에는 공산당 조직 내에서 공격을 받고 중앙위원 직을 잃었다. 실각 후, 그는 중국에서 지하 좌익작가연맹의 지도자가 되어선되었고 [[루쉰]], [[마오둔]]과 일선에 있었고서서 많은 [[소비에트 연방|소련]] 작품을 번역하고 저술했다. 그는 중국어를 러시아어로 표기하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1934년]]에 그는 다시 [[마오쩌둥]]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장시 해방구]]로 들어가 소비에트 정부의 중앙집행위원과 교육부장을 맡았다. 홍군의 [[장정]]이 시작되자 그는 [[결핵]]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고 후방에 남았다. 그는 [[상하이]]로 피신하려고 했지만 [[1935년]] 초, 정부기관에 발각되었고 그해 6월 총살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