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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서광규'''(徐光奎, 1802년 ~ ?)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대구이고 자는 성서(聖瑞)이다. 분류:1802년 태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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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규'''(徐光奎, [[1802년]] ~ ?)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대구 서씨|대구]]이고 자는 성서(聖瑞)이다. [[정성왕후]]의 친정오라비 서명백의 6대손이다.
 
== 생애 ==
[[예조]][[참의]]를 지낸 [[서상록]]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성왕후]]의 친정아버지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7대손으로, [[1830년]] 7대조 [[서종제]]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이라 하여 특별히 [[음서 제도|음서]]로 채용되었다.
 
[[1830년]](순조 30년) [[7월]] [[돈녕부]]참봉, [[1832년]] [[6월]] [[제용감]]봉사, [[1833년]] [[6월]] [[상의원]][[직장]], [[1834년]] [[12월]] [[활인서]]별제가 되었다가 바로 [[한성부]] 주부로 나갔다. [[1835년]] [[6월]] [[의빈부]]도사, [[예빈시]]주부를 거쳐 [[사직서]]령이 되었다. 그해 [[10월]] [[노성]][[군수]]로 부임하였다. [[1840년]] [[6월]] [[풍기]][[군수]]로 부임하였으나 [[1841년]] [[3월]] 상소로 파직되었다. [[1842년]] [[8월]] [[선공감]]주부. [[9월]] [[평시서]]주부를 거쳐 [[10월]] [[한성부]]서유느로 부임했다가 [[1843년]] [[선공감]]주부로 되돌아왔다. [[1845년]] [[돈녕부]]주부가 되었다가 같은 달 [[한성부]][[판관]]으로 나갔다.
 
[[1846년]] [[장악원]][[첨정]]을 거쳐 [[수원]][[판관]]으로 부임하였다.
 
[[분류:1802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