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룡: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d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인터위키 링크 1 개가 위키데이터d:q6180267 항목으로 옮겨짐
편집 요약 없음
59번째 줄:
}}</ref> [[1594년]]에는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또한 제2차 조일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정유재란]] 때에 [[고령]]에서 적 장수를 생포하고(실록을 비롯한 다른 사서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고 오직 행장록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허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병마절도사가 되어 왜군이 철수한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별다른 전투 없이 탈환한다. [[광해군]]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사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오른다.(실록에 의하면 이때 높은 관직을 얻기위해 광해군이 총애하는 후궁들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말이 있다.)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재직 중 [[1622년]] [[통영]] 진중에서 병사했다. 상주 충렬사에 배향(현재는 충의사로 이전하여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그의 묘가 있으며 경북 기념물 제13호이다. 또한 현재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 마을에 사당인 '경충사'가 있고 중평리 당산골 진양 정씨 사당 아래쪽 100m지점이 정기룡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생가 뒤쪽에 있던 대밭이 약간 남아 있다.
 
인터넷이나 소설매체에서 이순신에 버금가는 명장으로 다뤘던 적이 있으나 이는 대부분 공식적인 사서가 아닌 가문 행장록에 근거한 것으로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싸운 공로는 있지만 대부분 소규모의 전투였으며 그나마 큰 전투였던 사천왜성 전투에선 대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당대의 명장 이순신이나 육지에서 공로가 상당히 컸던 권율, 김시민에 비하기엔 무리가 크다. 종전 후 공신도감에서 이름이 거론되긴 했으나 최종적으로 18인의 선무공신에 들지 못했고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인물들이 받던 선무원종공신에 봉해진다.
 
== 일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