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일본 프로 야구 재편 문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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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과 일류 레저 산업으로 성장한 프로 야구는 1948년에는 절반 이상의 구단들이 흑자를 기록했고, 이 성장이 지속되면 이듬해에는 전 구단 흑자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나오는 등<ref>《전술 일본 프로 야구 40년사》 p.147</ref> 준사업화되었다. 전쟁 이전부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고생하던 것이 결실을 맺었으니 야구는 기업화해야 한다는<ref>《전술 일본 프로 야구 40년사》 p.147</ref> 관계자도 있었다. 한편 프로 야구의 성장은 다른 기업들의 이목도 집중시켜 참가를 희망하는 기업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 발단 ==
1949년 [[2월 4일]]에서4일에서 [[2월 5일]], 이틀 동안 연맹 사용자 회의가 열렸다.<ref>《전술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걸음》 p.168</ref> 기구 개혁 방안의 하나로 연맹 의원커미셔너 직책을 신설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초대 커미셔너는 [[요미우리 신문]]의 사장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소유자였던 [[쇼리키 마쓰타로]]가 연맹 명예 총재도 겸하고 있었지만 [[민정국]]과 [[일본 법무청|법무부]] 특별 심사국으로부터 쇼리키는 [[공직 추방]]된 신세였고 GHQ에서도 금지했기 때문에 5월 13일부로 커미셔너직을 사임했다.
[[쇼리키 마쓰타로]]가 연맹 명예 총재도 겸하고 있었지만 쇼리키는 공직 추방된 신세였고 GHQ에서도 금지했기 때문에 [[5월 13일]] 의원 직은 사임했다.
 
사임 전인 [[4월 15일]]<ref>《전술 신판 타이거스의 자라난 내력》 p.294</ref> 명예 총재였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쇼리키가 연맹 총재 취임 기자 회견에서 "기존의“기존의 6개 구단을 8개 구단으로 확대한다(참고로 밝혔던 이 시점에서는 이미 8개 구단이었다). 그래서 안정되면 10구단으로 확대하고, 다음에는 12구단으로 확대한 뒤 양대 리그로 나눈다"는<ref>《전술 일본 프로 야구 40년사》</ref>”는 이른바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를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야구]]를 모방한 2리그제양대 리그제 도입 구상인 '''"쇼리키일명 구상"'''을‘쇼리키 구상’을 의견으로 표명했다. 이때 동시에 미국에서 팀을 초대, 도쿄의 전용 구장을 1구장 추가 건설하는 3번째세 번째 의견도 표출했다.<ref>《전술 신판 타이거스의 자라난 내력》 p.294</ref>
 
쇼리키는 두 개의 리그 중 한 리그의 기둥이었던 [[요미우리 신문을신문]]을 모기업으로 하는 거인으로, 다른 리그의 기둥으로써 당시 프로 야구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확대를 계속하고 있던 요미우리 신문을 라이벌시 하고 그에 따라 프로 야구 진출을 노리고 있던 [[마이니치 신문]]에 화살을 돌렸다. 마이니치 신문은 7월에 비공식적으로 가입을 타진,<ref>《전술 일본 프로 야구 40년사》, 《전술 신판 타이거스의 자라난 내력》(p.295)에 의하면 8월로 기술되어 있다.</ref> [[9월 21일]] 마이니치 오리온스(현재의 [[지바 롯데 마린스]]) 가입을 연맹에 신청했다.
 
[[9월 22일]], 마이니치 신문은 "본사에서“본사에서 이전부터 국내·외적인 갈망으로 직업 야구 팀 편성을 계획했으며, 관계있는 다른 방면과의 의견 절충을 하고 있었으나, 9월 21일 공식적으로 일본 야구에 가입 신청을 했다"라고했다”라고 밝혔다.<ref>《전술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걸음》 p.176</ref>
 
==기존 구단들의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