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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되었으나 지도교수 [[김학준]]의 배려와 동료 학생들의 기지, 아버지 서문수의 로비, 당시 판사였던 [[고영구]]의 배려 등으로 중형을 모면하고 [[1980년]]에 석방, [[서울대학교]]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서울대 대학원 진학에서 낙방하고 [[일본]]으로 유학, [[도쿄 대학]]에서 [[와다 하루키]]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1995년]] 귀국, [[경남대학교]] 극동문제 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외교안보연구원]] 정치학 부교수와 교수를 역임했다.
 
[[2001년]] [[상지대학교]] 인문대학 교양학과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2002년]] [[12월]]부터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3년]] [[3월]] [[국가정보원]]장 특별보좌역을 거쳐 [[4월]]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이기획조정실장이 되었다.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재직할 때 '북한 개혁 개방론자', '[[주체사상파|친북좌파]]' 등의 이념 성향 시비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국정원의 인사·조직·예산 등을 총괄하며 국정권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ref name="vivios">[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artid=12245&code=113 <nowiki>[</nowiki>강금실 행보<nowiki>]</nowiki> 강금실·서동만 결혼설의 진상] 주간경향 뉴스메이커 제680호</ref> 그러나 [[고영구]] [[국가정보원]]장과의 갈등으로 스스로 물러나 다시 교단에 복귀하였다. [[박헌영]]의 저서인 [[이정 박헌영 전집 간행위원회]]의 간행위원, [[프레시안]]지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