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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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의 기원과 편집 ==
[[File파일:Chludov david.jpg|thumb|left|309px|<center> IX ]]
[[유대교]] 전통은 시편이 [[다윗 왕]]의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시편이 여러 작가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며, 다수는 저자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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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입장에서는 표제가 그 시의 저자나 기원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보를 알려준다고 간주한다. 그렇게 보는 것은 그 표제가 시편 기자의 것이거나 각 시편이 생겨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첨가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비평가들은 대개 표제가 후대 편집자들의 첨가이기 때문에, 그것이 붙은 시의 기원이나 만들어진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준다고 믿지 아니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시편들의 기원이나 산출된 상황에 대하여 여러가지 이견들이 나타난다.
 
=== '[[다윗]]의' 시편 ===
19세기까지 시편의 저자는 다윗인 것으로 여겨졌다. 특별히 시편 자체에서 다윗의 이름으로 칭해지는 시편은 모두 74편이나 된다. 칠십인역은 더욱이 14편의 시가 추가로 다윗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대체로 신약성경 저자들은 시편의 저자가 다윗인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마르코의 복음서]] 12장 35절에서 37절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라며 다윗의 저작설을 확고히 여기고 있다.
19세기까지 시편의 저자는 다윗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이 논제에 대해서 전혀 비평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인용된 시편 2편은 다윗의 시라고 표제가 적혀있지도 않는데 말이다. 사무엘 상.하서도 역시 사무엘이 죽은 이후의 이야기가 나옴에도 저자가 사무엘로 되어있다. 이것은 오경이 모세의 이름으로, 잠언을 솔로몬의 이름으로 칭하는 것과 같다.
특별히 시편 자체에서 다윗의 이름으로 칭해지는 시편은 모두 74편이나 된다.
칠십인역은 더욱이 14편의 시가 추가로 다윗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대체로 신약성경 저자들은 시편의 저자가 다윗인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마르코의 복음서]] 12장 35절에서 37절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라며 다윗의 저작설을 확고히 여기고 있다.
이는 이 논제에 대해서 전혀 비평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인용된 시편 2편은 다윗의 시라고 표제가 적혀있지도 않는데 말이다.
사무엘 상.하서도 역시 사무엘이 죽은 이후의 이야기가 나옴에도 저자가 사무엘로 되어있다.
이것은 오경이 모세의 이름으로, 잠언을 솔로몬의 이름으로 칭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전적으로 시편과 다윗의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윗이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음도 그가 시편의 많은 부분에 개입했음을 알게 해준다.
다윗이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음도 그가 시편의 많은 부분에 개입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럼에도 시편의 전체도 다윗의 것이 아니며, 다윗의 이름의 표제가 있다고 다윗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편의 표제의 '레다윗'이라는 말도 다윗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지만, 다윗을 위한, 다윗에 관한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다윗의 시편이라는 것은 왕궁에서 불릴 수 있는 인증서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후대로 가면서 더 많은 시편을 다윗의 삶과 연관시키면서 다윗의 이름으로 칭해진 것들이 많아진다.
시편의 표제의 '레다윗'이라는 말도 다윗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지만,
다윗을 위한, 다윗에 관한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말하자면 다윗의 시편이라는 것은 왕궁에서 불릴 수 있는 인증서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후대로 가면서 더 많은 시편을 다윗의 삶과 연관시키면서 다윗의 이름으로 칭해진 것들이 많아진다.
 
이것은 다윗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와 동일시 여기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윗은 모형적인 인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참상과 위대함을 모두 보여주는 양면 모두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다윗의 실패와 좌절,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되는 그의 모든 인생역정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든 시대에 타당한 그들 자신의 경험에 관한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와 동일시 여기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윗은 모형적인 인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참상과 위대함을 모두 보여주는
양면 모두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다윗의 실패와 좌절,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되는
그의 모든 인생역정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든 시대에 타당한 그들 자신의 경험에 관한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시편 분류의 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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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권 (1편-41편) ===
==== 시편 구성에서 1편과 2편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 ====
시편의 첫머리는 이스라엘 신앙에 대한 핵심적 언급이다. 1편에서 권하는 복된 삶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삶이다. 시편 1편의 율법은 시편 전체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편 1편은 다음 시편들로의 초대인 것이다. 1편이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2편은 국제적인 차원으로 포로 후기 것을 제시한다. [[토라]]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의 계시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믿음의 두 주제는 시편이 그 최종적 형태를 갖추기 이전부터 전해오는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신앙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시편의 첫머리는 이스라엘 신앙에 대한 핵심적 언급이다.
1편에서 권하는 복된 삶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삶이다.
시편 1편의 율법은 시편 전체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편 1편은 다음 시편들로의 초대인 것이다.
1편이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2편은 국제적인 차원으로
포로 후기 것을 제시한다.
[[토라]]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의 계시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믿음의 두 주제는 시편이 그 최종적 형태를 갖추기 이전부터 전해오는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신앙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제2권 (42편-72편) ===
 
42편과 43편
43편에 표제가 따로 없는 것과 내용중 반복되는 같은 후렴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고려해볼 때, 시편 42편과 43편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시로 여겨진다. 후렴구를 고려해볼때 3연으로 나눠볼수 있다(제1연 :1-5절, 제2연 :6-11절, 제3연 :43편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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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태 「시편 주석 II」 서울: 횃불, 2006.
* 최종태 「시편 주석 III」 서울: 횃불, 2006.
 
{{토막글|기독교}}
 
[[분류:구약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