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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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는 ‘감았다’란 뜻이다. 《[[교황 연대표]]》에 의하면, 루스티쿠스의 아들로서 로마 태생이다. [[교황 마르코]]가 선종한 지 4개월 만에 새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율리오 1세는 주로 [[아리우스파]]의 주장에 맞서 정통 교리를 지지한 활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죽음으로 [[로마 제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삼등분되었다. 두 아들 중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는 정통 그리스도인이었고 동로마를 차지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주의]] 추종자들과 가까이 지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아타나시오]] 주교를 유배지에서 돌아오게 하였다. 이 시도는그러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아리우스주의]]를 따르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콘스탄티노폴리스 의하여총대주교]])의 이루어졌다.추종자들은 그러자341년 아리우스주의를안티오키아 따르던시노드에서 동방의아타나시오 주교들이 아타나시우스를주교를 다시 추방시켰다.추방하는 주교들은동시에 서방 황제 [[콘스탄스]]와 교황 율리오 1세에게 사절을대표단을 보내어보내 티르아타나시오의 공의회의주교직 결정을퇴위를 재가하고갱신하고 [[알렉산드리아]] 들어가려는 피스투스를 인정해 달라고주교로 청하였다인정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율리오 1세에 의하여 이 소식을 들은 아타나시우스는 [[338년]]아타나시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시노드에서 에우세비오에우세비우스의 지지자들이 자기에게자신에게 가한 일에 대하여 변명하고 그 결과를 율리오 1세와 다른 주교들에게 발송하였다. 율리오 1세는 양자를아타나시오에게 중재하기우호적인 위하여의견을 회의를표명한 소집하였다후에 중재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해 양측 모두를 초대하였다. 하지만 율리오 1세의 제안에 대해 동방의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한편 [[339년]]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귀양을 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미 에우세비우스의 추종자들이 물리적으로 그를 밀어낸 후 피스투스 대신 카파도키아의 그레고리오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취임시켰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사건에 대해 항의하였다. 율리오 1세는 에우세비오에게 사절을 보내어 로마의 교회회의에 참석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절들이 에우세비우스의 지지자들에 의해 안티오키아에 장기간 머물게 되자 할 수 없이 부정적인 응답을 받고 로마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