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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후와 와공후에 대한 언급은 《[[수서 (책)|수서]]》〈음악지〉에 소개된 [[고구려]] 음악 조에 처음 나타난다. [[수나라]]의 아홉 지역 음악을 소개하는 구부기(九部伎)의 하나로 고구려 음악이 소개되는데 수공후와 와공후가 주요 악기로 등장한다. 《[[삼국사기]]》〈악지〉의 백제악 조에도 공후가 악기로 등장하며 백제에서 일본에 전한 대공후가 [[나라 시|나라]]의 [[정창원]]에 현재 보존되어 있다. 또, [[신라 성덕왕]] 대에 만들어진 상원사 범종에도 공후를 연주하는 사람이 새겨져 있다. 또, [[1980년]] 발견된, [[발해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가 안장된 고분 벽화에도 공후를 연주하는 사람이 나온다. [[고려 예종]] 대에 [[송나라|송]]의 대성아악을 수입하는데 그 음악 구성에 공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듯 공후는 [[삼국 시대]]에 고구려가 서역의 음악을 수입하면서 들여와 고려 시대까지 널리 쓰였으나, 그 뒤에는 한국 음악에서 사라진다. 심지어 공후가 쓰였다는 기록도 없으며 연주법도 완전히 잊혀졌다. [[국립국악원]]에 [[1937년]] 중국에서 사들인 수공후와 와공후만 한 대씩 남아있다.
 
정철의 가사 사미인곡에 공후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북한]]에서는 공후를 개량하여 [[옥류금]]을 만들어 이용하고 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