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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서울 성곽|성곽]]의 문이다.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한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서울 성곽|성곽]]의 문이다.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조선 태조|태조]] 5년)에 처음 지어졌다. [[1453년]]([[조선 단종|단종]] 1년)과 [[1869년]]([[대한제국 고종|고종]] 6년)에 고쳐지었다. [[조선총독부]]가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겨 [[1934년]]에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2호로 지정하였다는 주장이 있다.<ref>「숭례문 일제 때 파괴될 뻔 했다」, 《경향신문》, 2003년 9월 2일.</ref>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으나, 수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지금은 [[종로구]] 관할에 속하게 되어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 역사 ==
 
[[1396년]]([[조선 태조|태조]] 5년)에 처음 지어졌다.
 
== 명칭의 유래 ==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에서 따왔는데, 이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원래는 '智'가 들어갔어야 하나, 통행을 금지했으므로 왕래가 없어 이름이 바뀌었다)이다(마지막 신은 고종 때 [[한양]]의 중심이었던 “[[보신각]]”의 이름에 쓰였다). 이때 다른 사대문의 이름이 석 자인 데 반해 흥인지문만 넉 자인데, 이는 [[고종]] 재위 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 (철학)|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로 지었기 때문이다.
 
[[1453년]]([[조선 단종|단종]] 1년)과 [[1869년]]([[대한제국 고종|고종]] 6년)에 고쳐지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2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ref>「숭례문 일제 때 파괴될 뻔 했다」, 《경향신문》, 2003년 9월 2일.</ref>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으나, 수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지금은 [[종로구]] 관할에 속하게 되어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 특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