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양 (제애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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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후 8년(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한 후 여씨가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안에 들어가 있던 동생 [[유장 (성양경왕)|유장]](劉章)이 알게 되었다. 유장은 형 유양에게 거병을 재촉해 자신들이 내응하고 형을 황제로 세우고자 하였다.
 
유양은 여씨가 감시역으로 파견한 제나라의 승상 소평(召平)을 공격해 자살로 내몰고 외척 사균(駟), · 낭중령(中令) 축오(祝午), · 중위(中尉) 위발(魏勃)과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낭야왕(琅琊王) 유택을 속여 유택의 군사를 빼앗고 여국을 공격하고 제후왕들에게 여씨를 규탄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상국 여산이 대장군 관영을 파견해 토벌하려 했지만 관영은 여씨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다. 또한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여씨에게 득을 보는 것이라 생각해 형양(滎陽)에 주둔하고 제왕을 비롯한 제후왕들에게 여씨가 타도될때까지 기다리라는 공문을 보냈기 때문에 제왕 유양은 국경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여산 여록등의 여씨들은 유장과 [[주발]](周勃), [[진평]](陳平)등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대신들은 다음 황제를 누구로 하는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유양의 어머니의 친정 사씨(駟氏)가 악인이라는 이유로 유양은 선택되지 않고 대신 고조의 넷째아들 대왕(代王) 항(恒)이 선택되어 황제로 옹립되어 [[전한 문제|문제]]로 즉위했다. 유양은 군사를 이끌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문제는 여씨가 빼앗아간 성양(城陽), 낭야(琅琊), 제남(濟南)군을 제나라에 반환했다.